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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언론 숙정·통폐합|허문도씨 반대파 모르게 대통령재가 강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언론통폐합작업이 허문도-이상재 라인에서 신 군부 실세인 허화평·허삼수씨 등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추진되었지만 입안에서 실천에 옮겨지기까지 5개월간 내부적으로도 적지 않은 곡절을 겪었다.
허문도씨 자신도 지난 22일 국회문공위증언에서 국보위 문공분과위원으로 두 차례, 청와대 비서관시절인 80년 10월 한차례 전두환 대통령에게 결재를 올렸다가 각하 되었다고 말해 당시 권력내부에서 상당한 반대 또는 이견이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바 있다.
허씨와 함께 당시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했던 C씨의 증언.
『청와대비서실내에서도 언론통폐합에 관해 의견이 크게 둘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주로 민간인 출신들은 강력하게 반대했는데 당시 김경원 비서실장, 우병규 정무수석, 이웅희 공보수석비서관 등이 이에 속했습니다. 물론 허화평 비서실보좌관·허삼수 사정수석·이학봉 민정수석비서관과 허문도 정무비서관(1급)은 추진파였지요.
민간인 출신 반대파들은 언론통폐합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무리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 무리하면 부작용이 많다」는 말을 하며 자제를 요청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때 분위기가 그랬으니까 전두환 대통령에게도 누군가 「신중히 해야된다」고 진언했을 겁니다. 문제는 허문도씨였습니다.
언론통폐합추진의 핵심인데다 너무 주관이 뚜렷하고 독특한 논리전개의 힘을 가졌던 그는 주위의 충고를 전혀 들으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사람들과 거의 의견교환이 없었습니다. 결국 통폐합 결재는 허씨 쪽이 대통령을 다시 설득한 뒤 이광표 문공부장관을 시켜 추진 반대파들 모르게 해치웠습니다. 결재 후에야 비서실장이, 알았을 정도니까요.』
언론통폐합은 청와대 내에서도 충분한 공감대를 마련하지 못한 채 당시 「민족적 민주주의」를 부르짖고 나온 개혁주도세력들의 밀어 붙이기식 수법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전두환 대통령 자신도 그해 11월 8일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통폐합 소문이 나돌던데 진짜 실행하실 겁니까』라는 질문에 『글쎄, 필요성도 있긴 한데 보상문제도 있고 문제가 많단 말이야』라고 소극적인 대답을 해 내부의 갈등이 어느 정도 있음을 내 비췄다.
청와대뿐이 아니었다. 사회개혁작업을 추진해왔던 국보위쪽에서도 이미 반대의견이 많았다.
당시 국보위 핵심멤버였던 모씨의 증언.
『문공위원인 허문도씨가 이 문제를 들고 나오자 상당수 의원들이 이의 내지는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언론을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재편하는 게 과언 가능하고 타당하냐는 거였지요. 또 나중도 생각해야 된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오자복 위원장과 허씨간에 언쟁을 벌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허씨 쪽이 우세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죠. 여려 의원들이 이의를 제기했다고는 하나 드러내놓고 적극적인 반대를 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다만, 다수의사가 부정적이었기 때문에 언론통폐합 조치가 실행에 옮겨지기까지 상당히 시간이 걸렸던 것입니다.
허씨는 문공 분과위원회에서 브레이크가 자주 걸리자 일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했던지 그후에는 별로 거론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전대통령과 신 군부의 핵심을 설득하는데 몰두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오문공 분과위원장은 이 문제에 대해 『이제 와서 저 혼자 살기 위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다』며 일체의 언급을 회피했다.
그리나 당시 국보위관계자는 『이미 방향을 정해놓고 움직이고 있는 마당에 오위원장 등 위원들로서는 적극적으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80년 8월말 전두환 국보위상임위원장이 대통령으로 옮겨 앉자 실세였던 허삼수(인사처장), 허화평(비서실장), 이학봉(대공처장)씨 등은 청와대로 자리를 옮기고 보안사는 노태우 신임사령관 체제로 바뀐다. 허화평씨는 청와대 비서실보좌관으로 사실상 비서실차장 역할을 했고 허삼수씨는 사정수석, 이학봉씨는 민정수석이 되었다.
따라서 이때부터 힘의 중심은 보안사에서 청와대로 옮겨지고 보안사는 집행기관으로 바뀌고 만다.
3명의 수석비서관은 당시 전대통령과 단순한 상하관계 만은 아니였다. 그들에겐 킹 메이커로 막강한 힘이 있었고, 어느 의미에서 사실상의 주주관계였다. 또 나름대로 역사적인 사명감도 있었다. 결국 허문도씨는 이들 실세들을 붙잡았던 것이다.
11월 12일 언론통폐합에 관한 계획안이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보안사령관에게 집행이 위임되는데 지방언론사에 대한 통폐합내용이 대통령 결재서류에 들어 있었느냐 하는 문제가 의혹이 되고있다.
지난 10월 22일 국회문공위에서의 증언에서 허문도씨는 『서울 쪽은 내가 구체적으로 입안했지만 지방은 1도1사 원칙만 결재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전대통령의 결재를 받아 노태우 보안사령관에게 전했던 이광표 문공장관은 『결재내용엔 분명히 지방사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실제 80년 11월 12일 언론사 사장들에게 이른바 포기각서를 받을 때는 지방언론사도 함께 집행됐다.
이 부분에 대해 당시 보안사 관계자 L씨의 증언.
『허씨 말대로 대통령 재가서류 속엔 지방사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 노사령관이 받은 결재서류에도 없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때는 이미 통폐합 추진파들이 구체적인 안을 만들어 놓았었기 때문에 내용이 들어 있고 안 있고 가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보안사 안에는 이미 이상재씨가 주도하는 언론대책반이 있었고 청와대 쪽과 긴밀한 관계가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청와대 쪽의 3허씨와 보안사 쪽에도 연계되어 있던 이씨가 권력기반을 더욱 굳게 해나가는 과정에서 언론통폐합을 강하게 추진했고 그 세부계획의 입안 및 집행에서도 이들의 뜻이 그대로 실행됐음이 증명된다.
전대통령이 재가하기 전인 10월에 보안사 측에서 청와대에 올라가 언론통폐합에 관한 브리핑 및 재가시도를 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허문도씨가 증언한 10월의 세 번째 재가시도와 그것이 동일한 것인지는 더 밝혀져야 할 대목이다.
만약 동일한 것이었다면 두 번의 재가시도에 실패했던 3허씨가 보안사를 시켜 재가시도를 했던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청와대 쪽 내부 분위기가 신중론을 펴는 사람들이 많았고 전대통령자신이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3허씨가 보안사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도 청와대의 허화평·허삼수씨와 보안사의 권정달 정보처장, 그리고 양쪽 일을 다 봤던 이상재씨는 긴밀한 콤비플레이를 했다. 때문에 보안사는 사실상 허씨들의 수중에 있었고 노태우 사령관이 전대통령의 결재서류를 가져온 이광표 문공장관에게 『왜 우리에게 악역을 시키느냐』고 대노한 것도 이 같은 힘의 구도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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