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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언론 숙정·통폐합|갑자기 직장 잃은 707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80년 6월 6일 현충일.
삼청동 국보위사무실은 바깥세상의 한가로움과는 달리 바쁘게 움직였다.
오자복 문공분과위원장·허문도·김행자씨(작고·당시 이대교수) 등 문공분과위원들, 보안사의 허화평 비서실장·허삼수 인사처장·이학봉 대공처장 등이 모여들었다.
국보위가 발족한지 1주일, 그리고 국보위상임위원 30명의 명단과 상임위에 소속되는 분과위구성이 발표 된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날 모임은 이미 개혁주도세력 안에서 거론되어온 어마어마한 문제를 논의했다.
이른바 한국 언론사에서 가장 「가혹하고 비참했던 시기」로 기록될만한 80년의 언론인 해직사태와 언론기관 통폐합의 기본구상이 백지 뒤에서 그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그려진 언론재편구상은 그 후 6개월 여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7백 7명의 기자해직, 전대 미문의 언론사 통폐합이란 「80년의 언론 대학살」을 가져오고 말았다.
당시는 계엄하였고 또 신 군부의 핵심세력 및 이들과 가까운 언론계·학계인사들 수명만이 직·간접으로 관여했기 때문에 그 실상이 지금까지도 충분히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한국언론은 거의 무방비상태에서 기습을 받아 쓰라린 80년을 보내야 했다.
이 모임에 참석했던 K씨는 후일 그때의 분위기를 이렇게 술회했다.
『모두가 새 시대를 창조해야한다는 생각에서 비장한 분위기였습니다. 이미 공직자 숙정 원칙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인지 신군부 핵심세력은 언론계도 예외일 수 없다는 결심을 하고 있더군요.
다만 사회적 파급효과가 크기 때문에 무척 신중을 기했습니다. 처음에는 무엇부터 손을 대야할지 막막했지만 차츰 가닥이 잡혀갔습니다. 그런데 얘기를 하다가 보니 저 자신 캥기는 일이 생겼습니다. 가만 보니 저의 가까운 인척이 근무하는 신문사를 없애자는 얘기가 나오지 않겠어요. 사정을 얘기할 수도 없고 혼자 무척 고민했어요.
그러나 이들은 언론통폐합이 가져다줄 물의를 우려, 먼저 「정화」라는 이름 하에 사별로 기자 추방계획부터 실천에 옮기기로 하고 통폐합은 일단 뒤로 미뤘다.
언론계는 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와 함께 기자협회 회장단이 검거되고 5월 20일을 전후해 전국적으로 번졌던 검열거부와 제작거부운동이 1주일만에 무산되자 불길한 조짐을 느꼈다.
드디어 6월 9일 일선 기자들의 제작거부운동에 대한 응징 성격의 언론인 구속사건이 발생했다.
계엄당국은 『언론인의 조직적인 외부불순세력과의 연계와 사주에 따라 악성적 유언비어를 유포시켜 국론통일과 국민적 단합을 저해하고 있는 혐의가 농후하여 부득이 8명의 현직언론인을 연행, 조사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7월 들어 반정부성향의 언론인들을 숙정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얼마 되지 않아 문화방송· 경향신문의 이진희 사장이 전 사원의 사직서를 제출 받고 그중 부장급 이상 간부는 7월 15일에, 기자는 19일에 일부 사표를 수리했다.
곧이어 KBS가 6차에 걸쳐 일반사원을 포함해 1백 40명을 해고했고, 각 언론사는 대체로 7월말까지 비슷한 방법으로 사표를 수리, 해직작업을 완료했다.
사에 따라서는 일부 기자들이 사표제출을 거부하는 사례가 있었지만 이러한 저항은 아무런 효력을 거두지 못했다.
당서 모 신문사 편집국장을 지냈던 S씨는 『사장 선에서 그 문제가 결정됐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대상자가 전달된 느낌을 받았다』고 말한다.
각 언론사는 이 블랙리스트에 오른 대상을 문공부·보안사·국보위에 확인하느라 법석을 떨었고 희생자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로비를 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해직기자 명단작성과 언론 통폐합에 핵심적 역할을 한 당시 계엄사 검열단보좌관 이상재씨(전 민정당 사무차장)는 『4월에 검열단에 나가 일했는데 내 임무는 중견언론인들을 만나 언론계 현황을 파악해 위에 보고하는 일이었다. 어떻게 보안사가 언론계에 대한 정보를 모두 알았겠는가. 관계되는 기관·단체에서도 많은 정보를 넘겨주었다』고 말해 중앙정보부· 경찰 등 유관기관과 언론계 내부의 협조가 있었음을 시사했다.
아무튼 계엄당국은 숙정 대상 기자를 「정치유착」 「부정부패」 「체제도전」의 3가지로 분류했다. 그러나 이 같은 원칙이 제대로 적용됐는지에 대해서는 그 뒤 두고두고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해직됐다가 6공화국 출범 후 복직된 C씨는 『당시 언론인 해직을 권력이 요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에 언론 경영주들이 편승했다. 각 회사에서 귀찮은 존재라고 여겼던 기자들이 상당수 포함된 것만 보더라도 80년 언론인해직은 권력과 경영주들의 부분 합작품인 것 같다』고 주장한다.
소위 언론인 자율정화 결의문에 따라 각 언론사는 8월 2일 중앙매스컴, 4일 합동통신, 9일 동아일보, 10일 한국일보…순으로 전국 38개 언론사에서 모두 7백 7명의 언론인들이 직장에서 쫓겨나게 된다<표 참조>.
언론인 해직에서 자신을 얻은 신 군부는 10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언론사 통폐합을 본격 검토하기 시작했다.
어느 방송이 없어지고 어느 신문이 살아 남는다더라 는 식의 소문이 나돌았다.
이상재씨의 증언.
『지방에서의 언론인들 비리, 재벌의 언론기업소유, 언론인들의 열악한 처우 및 업무환경, 그리고 언론인들의 수준저하 등 당시 언론계가 안고있는 문제점들을 제기한 것은 언론인 스스로였습니다. 내가 만난 많은 중견언론인들이 한국언론이 개선할 사항들을 내게 귀띔해 줬습니다. 물론 당시 개혁주도세력이 새로운 사회질서를 위해서는 언론개편은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지요….』
언론통폐합이 검토 된지 6개월 후에야 실천에 옮겨진 것은 기업체의 소유권을 강제로 바꾸는데 따른 보상문제 등 후속조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보안사령관은 그 해 10월 중순 몇몇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우리 캐퍼서티(Capacith·보상자금 문제를 지칭한 듯) 에 문제가 있어서…』라고 신중한 반응을 나타냈고, 전두환 대통령은 11월 8일 기자들과 저녁을 함께 할 때까지만 해도 『정말로 언론통폐합을 하실 겁니까』라는 기자들 질문에 그 필요성을 얘기하면서도 『방송사의 보상에 돈이 많이 들어 쉽지가 않아』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러한 얘기들은 언론통폐합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한 폭이 누구인지, 추진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을 싸고 내부적으로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를 유추하는 하나의 단서가 아닐 수 없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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