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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불황이 닫은 지갑, 추위가 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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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박대영(38) 현대백화점 아웃도어 바이어는 이달 들어 열 차례 이상 아웃도어 생산업체의 물류창고를 방문했다. 제품 확보에 비상이 걸려서다. 그는 “패딩·점퍼 같은 상품이 예상보다 훨씬 잘 팔렸다”며 “다음달 9일까지인 송년세일을 앞두고 디자인·사이즈별로 제품을 충분히 구해 놓기 위해 백화점끼리 경쟁이 치열해졌다”고 말했다.

 종전처럼 ‘행사 기획서’로 아웃도어 브랜드들과 서류만 보내고 받는 대신 물류창고에 백화점 바이어들의 직접 방문이 이어지고 있다. 이달 들어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겨울옷들이 잘 팔리기 때문이다. 19일까지 현대백화점의 아웃도어 의류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80% 늘었다. 아웃도어뿐 아니다. 겨울용 남성 정장은 200%, 모자·장갑은 255%, 모피가 102% 매출이 늘었다.

 이에 힘입어 백화점 장사도 모처럼 잘됐다. ‘추위가 최고의 영업사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22일까지 3대 백화점의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평균 13.4% 올라갔다. 백화점별로는 롯데(14.1%), 신세계(13.7%), 현대(12.5%) 모두 두 자릿수 성장했다. 신세계의 경우 올 들어 월별 매출 신장률은 -0.9~9.3%였다. 이달에 올 최고 신장률을 기록한 셈이다.

 상품군별로는 옷이 가장 잘 팔렸다. 롯데의 경우 올 들어 10월까지 남성복·여성복 신장률은 2.5%, 1.7%에 그쳤다. 하지만 이달 들어선 각각 32%, 34%를 기록했다. 신세계는 패션 상품군이 23.2% 신장했다. 신세계 관계자는 “코트·패딩 같은 겉옷이 많이 팔린 덕”이라며 “무엇보다 패션상품이 잘 나가야 백화점이 잘된다는 공식을 확인했다”고 풀이했다. 구두 판매도 부쩍 늘었다. 일반 구두에 비해 값이 비싼 부츠가 잘 팔린 덕분이다. 롯데에서 10월까지 평균 4% 신장에 그치던 구두가 11월 들어 지난해보다 20% 더 팔린 것이 대표적이다.

 겨울 패션상품 중에서도 비싼 것이 잘 팔렸다. 지난해까지 유행이던 얇은 패딩 대신 두꺼운 상품의 매출이 높아진 것이다. 오리·거위의 깃털을 넣어 만든 ‘다운 재킷’은 충전재 300g을 기준으로 ‘슬림(slim)’과 ‘헤비(heavy)’로 나뉜다. 아웃도어 브랜드 밀레 마케팅팀의 강선희씨는 “원래 헤비 재킷은 전체 매출의 30% 정도였는데, 올해는 50%로 늘어났다”고 말했다. 슬림 재킷은 10만~20만원대, 헤비 재킷은 30만~70만원이다. 지난해 11월보다 평균 섭씨 4도 낮은 날씨 덕분에 비싸지만 두꺼운 옷을 찾는 소비자가 늘어났다는 뜻이다. 이에 맞춰 롯데는 23일부터 열고 있는 ‘겨울 다운 재킷 특집전’에서 헤비 재킷 수량을 종전 30%에서 50%까지 늘렸다.

 여성 고객들이 패딩에 지갑을 열기 시작한 것도 변화 중 하나다. 현대가 여성복 브랜드 13개에서 이달 들어 가장 잘 팔린 품목 3개씩을 조사한 결과 39개 중 절반 이상인 19개를 패딩이 차지했다.

유재현 여성의류 바이어는 “‘뚱뚱해 보이는 옷’이라 생각해 잘 팔리지 않았던 패딩이 올해 인기가 좋았다”며 “캐시미어·니트를 덧대는 식으로 디자인을 강화했고 얇고도 따뜻하게 만드는 기술도 좋아졌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또 “패딩이 진화하면서 가격 또한 코트 수준으로 올라와서 백화점 매출에도 긍정적 영향을 줬다”고 덧붙였다.

이달 백화점 매출이 6개월 만에 증가세로 바뀌었다. 추위 때문에 방한 의류 등의 판매가 늘어난 덕을 봤다. 25일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9층 이벤트홀에서 고객들이 겨울 의류를 고르고 있다. 오종택 기자

 이 같은 ‘매출 기지개’가 계속될 것인지에 대한 예측은 엇갈린다. 특히 지난해와 비교해 보면 소비심리가 회복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평년보다 섭씨 2.9도 낮아 추웠던 지난해 12월에도 백화점의 평균 매출은 11% 늘어났지만 한 달 후에는 다시 4.2%로 낮아진 후 한 자릿수에 머물렀다. 3월에는 1%대까지 떨어졌다. 이재진 신세계 영업전략담당 상무는 “이번 매출 증가가 일시적인지, 불경기 탈출의 신호인지는 명확지 않다”며 “하지만 불씨를 살리기 위해 올해 마지막인 송년 세일에 전력을 다해야 하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추위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백화점들의 노력이 한창이다. 우선 아웃도어·패딩 할인행사를 대폭 늘렸다. 현대는 다음달 9일까지 17일 동안 아웃도어 행사만 19개를 연다. 지난해는 같은 기간의 송년세일에서 10개 행사가 열렸다. 행사에 나오는 상품 물량은 3배로 늘려 잡았다. 또 이 기간 동안 500억원어치의 모피를 세일한다. 지난해 400억원 규모에서 25% 늘어났다.

 신세계는 10만원대의 다운 재킷까지 끌어들여 내년 2월까지 판매한다. G바이게스·애스크 같은 중저가 브랜드와 손잡고 총 500억원어치의 상품을 준비한 아웃도어 행사다. 강대연 여성캐주얼 담당 바이어는 “중저가 브랜드까지 투입하면서 전체 아웃도어 행사 물량이 지난해의 두 배 수준으로 늘었다”며 “추위로 인해 수요는 많아졌지만, 불경기로 고객이 가격에는 여전히 민감하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롯데의 박찬욱 영패션 선임상품기획자 또한 “지난해 이월 상품뿐 아니라 기획상품·신상품 할인도 병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백화점들은 일찍 온 추위뿐 아니라 미뤄진 결혼 시즌도 최대한 이용한다. 지난 4월 21일에서 5월 20일까지였던 윤달을 피해 겨울에 결혼하는 고객을 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여서다. 가구·가전제품 같은 고가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 신세계는 지난 6월 ‘S 웨딩 클럽’을 정비했다. 청첩장·예식장예약증을 제시하는 고객에게 마일리지를 쌓아주고 할인 쿠폰도 주는 프로모션을 강화한 것이다. 일부 점포에서 각자 진행하던 것을 전 점포로 확대해 일괄적용하고 예비부부 잡기에 나섰다. 고객 숫자뿐 아니라 한 사람이 쓰는 돈도 늘리겠다는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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