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에 카톡 보낸 엄마, 내용이…황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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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재 사진전문기자]

4인치 스마트폰 화면에서 잠시도 시선을 떼지 못한다. ‘하트가 생겼나’ 싶어 10분 간격으로 주머니 속 휴대전화를 꺼내 열어본다. 밥 먹은 뒤 ‘식후팡’, 아침에 눈뜨자마자 ‘모닝팡’을 하던 애니팡 매니어들이 이제는 각자 키운 용의 날개에 올라 하늘을 난다(‘드래곤 플라이트’). 모바일 게임이 국민들의 자투리 시간 속에 파고든 모습들이다.

최근의 ‘애니팡 신드롬’은 ‘게임 문외한’들이 주도하고 있다는 게 특징이다. 초·중·고교 학생뿐 아니라 40~50대 직장인과 주부들도 애니팡 등 모바일 게임에 흠뻑 빠져들고 있다. 하지만 대기업 임원회의 때 애니팡을 하다 들킨 회사 대표도, 버스나 지하철에서 틈만 나면 ‘팡팡’거리는 중년의 여성도 스스로를 ‘게임 매니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날마다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면서도 ‘나는 중독자가 아니무니다’를 외치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국민 게임’으로 떠오른 애니팡에도 명암은 존재한다. 연락이 끊긴 친구들과 하트를 주고받으며 다시 소통하는 즐거움도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적잖은 시간을 빼앗긴다는 부담 또한 만만찮다.

# 취업 준비생 이모(26)씨는 얼마 전 새벽 2시쯤 스마트폰 카카오톡(카톡) 알림 소리에 잠을 깼다. ‘하트 좀 줘’라는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이씨의 어머니였다. 최근 스마트폰을 새로 구입한 어머니께 카톡 메신저 게임인 애니팡을 소개해준 게 불과 며칠 전. 그 후 어머니는 ‘애니팡 삼매경’에 빠져 찌개를 올려놓고도 애니팡, 빨래를 돌리면서도 애니팡, 운전 중 신호 대기하면서도 애니팡을 했다. 이씨는 “엄마가 ‘아이패드로 애니팡을 하면 점수가 잘 나온다는데 그거 얼마면 사느냐’고 묻더라”며 혀를 내둘렀다.

# 대기업 계열사 사장인 이모(50)씨는 최근 그룹 사장단 임원회의에서 톡톡히 창피를 당했다. 애니팡 하는 재미에 푹 빠져든 이씨는 회의가 길어지자 스마트폰을 꺼내 문자메시지를 확인하는 척하면서 애니팡을 하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손가락을 놀리던 그는 순간 실내가 조용해지는 걸 느꼈다. 이씨가 애니팡에 열중하고 있는 걸 알아차린 다른 계열사 사장들이 토론을 멈추고 모두들 이씨를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이씨는 회의가 끝나자마자 스마트폰에서 애니팡 앱을 삭제했다. 하지만 작심삼일. 며칠 뒤 그는 슬그머니 애니팡 앱을 다시 깔았다. 이씨는 “담배는 끊어도 애니팡은 못 끊겠더라”며 씁쓸해했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했나. ‘생애 첫 게임’을 스마트폰으로 배운 이들의 열기가 무섭다.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이 지난 7월 ‘게임하기’를 시작한 뒤 1000만 다운로드를 돌파한 게임이 이미 3개다. 1000만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도 점점 줄어든다. ‘국민 게임’ 애니팡은 39일 만에 이용자 1000만 명을 달성했고 캔디팡은 28일, 드래곤 플라이트는 단 26일 걸렸다.

 ‘애니팡 시인’도 탄생했다. ‘서로가 소홀했는데/덕분에 소식 듣게 돼’. 직장인 하상욱(31)씨가 지어 인터넷에 퍼진 이 두 구절짜리 시구(詩句)의 묘미는 제목에서 완성된다. 이 시의 제목이 ‘애니팡’인 것을 본 사람들마다 무릎을 탁 친다. 헤어진 옛 연인, 연락이 끊긴 중·고등학교 동창, 단 한 번 만나 인사를 나눈 거래처 사람, 시댁 어르신 같은 ‘애매한’ 관계의 사람들에게서 카톡으로 ‘하트’를 받았을 때의 복잡난감한 감정을 잘 담아냈기 때문이다. 하씨는 인터넷상에서는 이미 ‘유명 시인’이다. 모바일 게임 열풍이 ‘B급 정서’를 타고 인터넷 문학에까지 스며든 셈이다.

 애니팡이나 드래곤 플라이트 같은 게임에는 사실 특별한 구석이 없다. 게임 방식이나 구성은 기존 게임들과 별 다를 게 없다. 애니팡은 같은 그림을 맞춰 터트리는 ‘헥사’류의 게임으로, 보석 3개가 한 줄로 이어지면 터지는 해외 유명 게임 ‘비주얼드’와 비슷하다. 그래서 애니팡 개발사인 선데이토즈의 이정웅(31) 대표는 표절 시비를 사전에 막기 위해 애니팡 출시 전 비주얼드에 직접 문의도 했다. “저작권은 보석 모양에만 해당되며 나머지 요소는 상관없다”는 답변을 받고 귀여운 동물 인형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1분간의 게임 한 번을 하는 데 ‘하트’ 1개가 소진되는 것은 일본 게임 ‘다이아몬드 대시’의 방식을 차용한 것이다. 캔디팡은 애니팡과 유사한 ‘팡류’ 게임이고, 드래곤 플라이트는 계속 전진하며 다가오는 장애물이나 적을 처리하는 ‘러닝류’ 게임의 전형이다.

 이 게임들은 만들기도 쉽다. 개발 기간과 인력, 마케팅 비용이 기존 온라인 게임보다 훨씬 적게 든다. 선데이토즈는 카톡용 애니팡을 만들 무렵 직원이 20명 안팎이었고, 현재 구글 앱 마켓 매출 1위를 고수하고 있는 드래곤 플라이트는 20대 청년 3명이 2개월 만에 뚝딱 만들었다. 올해 출시된 디아블로3나 블레이드앤소울 같은 대작 다중접속 역할수행게임(MMORPG)의 제작 기간이 3~4년, 제작비가 수백억원을 훌쩍 넘기는 것과 대조된다. 물론 수명은 짧다. 리니지 같은 온라인 게임이 10년 이상 고정적으로 매출을 올리는 것과 달리 모바일 게임들은 두세 달 동안 만들어 1년 정도 매출을 올리는 ‘단타식 게임’이 대부분이다.

게임을 게임으로 인식하지 않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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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왜 인기가 있는 걸까. 첫째는 ‘소셜(social)’, 즉 소통이다. 카톡을 만든 김범수(46) 카카오 이사회 의장은 “친구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소셜’의 요소 때문에 국민 게임이 탄생하게 된 것 같다”고 말한다. 게임 자체는 지극히 단순하지만 친구를 통해 게임을 소개받고 하트를 주고받는 과정이 애니팡에 전혀 다른 재미를 불어넣었다는 분석이다. 김 의장은 “애니팡이 자리를 잡은 것은 하트를 보내는 이가 친구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게임회사에서 하트를 보내고 초청했다면 ‘스팸 메시지’로 인식해 게임을 해보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게임과 메신저의 궁합이 잘 맞는 것은 이 때문이다. NHN의 ‘라인’과 다음의 ‘마이피플’ 같은 다른 모바일 메신저들도 뒤이어 메신저 안에 게임을 도입했다. 게임과 무관해 보이던 카톡의 중년층이나 여성 이용자들이 ‘친구와 함께하는 재미’ 때문에 앞다퉈 ‘열혈 게이머’로 변신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게이머가 아닌 게이머’라는 신인류가 등장한 셈이다.

 캔디팡과 바이킹 아일랜드의 제작사인 위메이드 엔터테인먼트의 남궁훈(41) 대표는 이를 “게임을 하면서도 그것이 게임이라고 인식하지 않는 사람들의 세상”이라고 표현한다. “PC 게임은 게임을 하기 위해 컴퓨터를 켠 뒤 1~2시간씩 투자하는 매니어층이 즐기고, 아무 때나 스마트폰을 켜서 잠시 즐길 수 있는 모바일 게임은 대중의 오락이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게임의 성패를 가르는 승부처도 달라졌다. 신재찬 이노스파크 대표는 “게임을 만드는 데도 인간에 대한 해석 능력이 중요해졌다”고 말한다. 온라인 게임 초창기에는 서버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했고, 이후에는 정교한 그래픽 같은 요소에 신경을 써왔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나 즐기고 동참할 수 있는 보편적인 재미가 뭔지를 정확히 짚어내 게임에 녹여낼 수 있느냐가 승부를 가르는 주된 요소로 떠올랐다.

 모바일 게임이 대중화된 데는 한국인들의 ‘인정 욕구’도 빼놓을 수 없다. 직장인 주모(30·여)씨는 기본 50만 점대를 찍는 ‘애니팡 고수’다. 회사 내에서도 주씨의 애니팡 실력은 소문이 자자하다. 수요일 점심시간은 주씨가 가욋일을 하는 시간.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면 주씨의 책상 위에는 스마트폰 10여 대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애니팡의 주간 점수 경신 시점이 매주 수요일 낮 12시이기 때문에 ‘나도 순위에 이름 한 번 올려보자’는 직장 동료들이 “한 판만 부탁해”라며 스마트폰을 맡기는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점수가 10만 점도 안 되는 ‘애니팡 하층민’들이라 주씨가 대충 게임을 해서 20만~30만 점을 올려줘도 기뻐한다. “고맙다”며 커피를 사주기도 한다.

 정성은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연동되는 모바일 게임은 내 점수를 남에게 자연스럽게 알리는 시스템이라 기존 PC 기반의 게임들보다 성취감이 높다”고 설명했다. 기존 게임에서는 자신의 점수와 발전 여부만 확인할 수 있지만 애니팡 등 모바일 메신저 게임은 내 점수가 평균 이상인지 이하인지와 같은 ‘의미’도 알려주기 때문에 경쟁의식이 더 높아진다는 얘기다. 정 교수는 “모바일 게임은 앞으로도 반응을 먹고사는 방식으로 발전할 것”이라며 “다른 사람의 반응에 민감하고 경쟁심리가 높은 중년 여성들이 애니팡 같은 게임에 빠져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덧붙였다.

순위 경쟁 스트레스 부작용도

 심리적 진입 장벽이 낮은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한국 사회에서 게임에는 ‘중독’이나 ‘과몰입’ 등 부정적 단어들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스타크래프트와 디아블로 같은 온라인 게임을 하면 ‘오타쿠’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하지만 모바일 게임을 할 때에는 그러한 ‘죄책감’이 거의 들지 않는다. 1회 게임 시간이 짧기 때문에 부담 없이 게임을 하는 것이다.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는 “디아블로나 리니지를 하면 ‘이러다 게임 폐인이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지만 테트리스를 하는 이들은 ‘누구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말했다. 위 교수는 “애니팡을 30~40번만 해도 한 시간이 훌쩍 가는데도 자신을 ‘헤비 게이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는 식”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따른 부작용도 생겼다. 오프라인의 ‘갑-을’ 관계가 온라인에도 적용되는 게 한 예다. 회사원 이모(28)씨는 얼마 전 부장에게 영문도 모른 채 불려갔다. 그는 다짜고짜 이씨에게 휴대전화를 내밀더니 “너 애니팡 잘한다며? 비법 좀 알려주라”며 ‘과외지도’를 요구해 왔다. 이후 이씨의 부서 전 직원은 “얼른 하트 보내라”는 부장의 닦달을 2~3시간 간격으로 받고 있다. 또한 거래처와의 관계에서 ‘을’의 위치인 회사 직원들이 상대 회사 담당자에게 울며 겨자 먹기로 ‘하트 상납’을 하는 경우도 적잖다.

 또래들로부터 인정받는 걸 중요시하는 청소년이나 어린 학생들에게는 순위 경쟁이 스트레스가 되기도 한다.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을 둔 김모(35·여)씨는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드래곤 플라이트를 대신 해주는 게 정해진 일과다. “순위가 높은 아이들이 반에서 인기가 많다”는 아들의 투정 때문이다.

 모바일 게임을 자주 즐긴다면 건강에도 신경 써야 한다. 고개를 숙인 상태로 스마트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목에 통증이 오고 목덜미와 어깨 근육이 뭉치기 쉽다. 작은 스마트폰 화면을 집중해서 바라보자면 눈 깜빡임이 줄어 안구 표면이 마를 수 있고, 게임을 오래 지속할 경우 안구건조증이 나타나거나 시력이 떨어지기도 한다. 의사들은 건강을 위해 10분쯤 게임을 한 뒤에는 목을 돌리거나 어깨를 풀어주는 등 간단한 스트레칭을 하고, 눈을 지그시 감거나 먼 곳을 쳐다보며 눈에 휴식을 줄 것을 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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