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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에 미친 19인 … “1600만원 색소폰 팔아 2집 앨범 냈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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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20일 서울 충무아트홀에서 서울솔리스트재즈오케스트라 홍순달 단장 등 19명 멤버 전원이 포즈를 취했다. 2집 발매 기념공연이 열린 이날 멤버들은 프로답게 맘껏 음악을 즐기는 여유를 보였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 20일 오후 8시. 서울 흥인동 충무아트홀 중극장 ‘블랙’의 무대에 불이 켜졌다. 정장을 차려입은 연주자들이 하나 둘 무대로 들어섰다. 재즈 공연 치고는 좀 사람이 많다. 모두 19명. 빨간 셔츠 차림에 베토벤 같은 파마 머리를 한 지휘자가 허공을 향해 손을 휘저을 때마다 관악기들이 소리를 내뿜었다. 국내에서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재즈 빅 밴드’다. 무대 왼편의 그랜드 피아노, 콘트라 베이스, 드럼, 일렉 기타는 그래도 익숙하다. 그 오른편에 3열로 맞춰 앉은 브라스(금관악기) 연주자 13명은 처음 본 관객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이 ‘낯선 빅 밴드’가 어떤 사운드를 추구하는지 파악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흑인 음악의 대명사인 재즈. 그런데 멜로디가 조금 색다르다. ‘천안 삼거리’가 대표적이다. 잔잔한 브라스 앙상블로 시작해 이내 그 유명한 ‘천안 삼거리 흥 흥/능수나 버들은 흥 흥’ 대목에서 3박자로 편곡된 세련된 브라스 소리가 흥겹다. 이어지는 알토 색소폰과 기타의 솔로 연주가 정통 재즈의 멋스러움을 더한다. 멤버 모두가 마치 “천안 삼거리 다 알지? 근데 이렇게 들으니 어때?”라며 작심한 듯 실력을 뽐내는 것 같다. 공연 내내 트럼펫 4대, 트롬본 4대, 색소폰 5대가 한꺼번에 하모니를 이룬 사운드는 흡사 할리우드 영화에서 가장 박진감 넘치는 명장면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가끔 무대 앞으로 나와 화려한 속주를 뽐내는 연주자들의 손가락 놀림엔 침이 꼴깍 넘어간다. ‘감수광’ 등 전속 재즈 보컬리스트와 함께한 무대에서도 연주자 한 명, 한 명이 ‘반주자’가 아닌 ‘프런트맨’이었다. 공연은 두 시간여 동안 논스톱으로 이어졌다.

 대부분 귀에 익은 우리 노래였다. 6·25전쟁 통에 한국인의 심금을 울렸던 ‘비 내리는 고모령’에서 조용필의 ‘서울서울서울’까지. 전국 팔도를 대표하는 가요들이 재즈로 편곡돼 새로 태어나고 있는 현장이었다고 할까. 실제로 그랬다.

모일 곳 없어 교회 예배당 빌려 연습도

홍순달 단장

 이날 공연은 ‘서울솔리스트재즈오케스트라’(이하 서솔재오)의 2집 ‘팔도유람’ 발매 기념 공연이었다. 연주자들이 오케스트라 형태로 모여 재즈를 연주하는 ‘빅 밴드(Big band)’다. 단연 돋보이는 사람은 무대 중앙에서 단원들을 지휘하는 홍순달(47) 단장이다. 홍 단장은 지휘를 하다가도 때로는 알토 색소폰, 소프라노 색소폰, 클라리넷, 플루트를 곡마다 번갈아가며 연주하는 ‘플레잉 코치’였다. 홍 단장과 18명의 연주자가 객석을 향해 내뿜는 브라스 사운드는 그야말로 ‘빅 밴드’의 매력에 흠뻑 젖게 하기에 충분했다.

 재즈는 아직 국내 대중에겐 익숙지 않은 장르다. 그나마 쿼텟(4인조)과 퀸텟(5인조) 밴드는 어느 정도 봐왔다. 하지만 빅 밴드는 손에 꼽을 정도다. 미국과 일본 등과는 사정이 다르다. 그만큼 여기까지 오는 데 굴곡도 많았다. 힘도 들었다. 홍 단장은 “피와 땀과 기름값(홍 단장 집은 천안이고 대전 등 지방에 사는 멤버가 모이느라 유류비가 적잖이 들었다는 뜻)”이라고 했다.

 서솔재오는 2003년 창단됐다. 홍 단장은 트럼펫·트롬본 등 빅 밴드에 필요한 연주자들을 직접 섭외했다. 왜? “10개가 넘는 관악기가 앙상블을 이루며 ‘빠빠밤’ 하고 내뿜는 소리를 들으면 정말 짜릿해서”라고 홍 단장은 답했다. 열정 하나로 시작했다는 것이다. 1992년 경희대 음대를 졸업한 홍 단장은 일본으로 건너가 색소폰과 재즈 이론을 배웠다. 거기서 소규모 재즈 밴드에선 흉내낼 수 없는 빅 밴드 사운드를 접했다. 귀국 후 재즈 피아니스트의 대부로 꼽히는 신광웅 선생이 이끌던 빅 밴드에 들어갔지만 연습 시간 맞추기도, 공연 여건도 좋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차렸다.

 하지만 재정이 문제였다. 연주를 위해 필요한 악보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앨범을 내기 위한 편곡과 녹음에 드는 비용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멤버들은 홍 단장이 다니던 교회 목사의 배려로 예배당에 모여 연습을 했다. 홍 단장은 “새벽에 연습이 끝나면 멤버 모두 교회 물건들을 다시 제자리에 놓고 청소까지 해놓고 나왔다”고 말했다. 1집 앨범을 내는 데는 7년이 걸렸다.

 2010년 당시 홍 단장은 애지중지하던 색소폰(1600만원짜리 빈티지 색소폰 셀마 ‘마크 식스’) 두 대를 팔아 제작 비용에 보탰다. 색소폰을 파니 1000만원가량이 수중에 들어왔다고 한다. 공연을 해서 개런티를 받으면 되지 않느냐고? 우리나라에서 재즈 밴드, 그것도 빅 밴드를 꾸리는 것은 옛 어른들 표현을 빌리자면 ‘돈 안 되는 짓거리’라고 했다. 더욱이 기존의 쿼텟과 퀸텟 재즈밴드와는 달리 19명이나 모인 빅 밴드를 불러주는 곳은 드물었다. 큰 무대와 많은 음향 설비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공연 기획자 입장에선 개런티 역시 많이 들어서다. 또 인원이 많다 보니 연습할 공간을 찾거나 연습 시간을 맞추는 일도 쉽지 않다. 국내에 명맥을 유지하는 재즈 빅밴드가 서솔재오 말고 거의 없는 이유다. 음악계에선 서솔재오가 2집 앨범을 내고 10년째 명맥을 이어 가는 것을 ‘경이적’이라고 평가한다.

“한국에서 빅 밴드를 운영한다는 것은 아직은 몽상이고, 인생에 대한 지나친 의미 부여이며, 결국에는 자기 학대다.”(재즈 평론가 황덕호씨의 ‘팔도유람’ 앨범 평 중에서)

 여전히 ‘음악=가요’ ‘수준 있는 음악=클래식’이 통하는 현실이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재즈 매니어가 꾸준히 늘고 있기 때문이다.

“악보 사갔더니 멤버로 받아줘”

 ‘무조건 목요일 자정부터 금요일 새벽 3시 넘어까지 연습한다’. 서솔재오에는 원칙이 있다. 학교 출강, 개인 레슨, 사업 등 각자 생업에 지장을 주지 않는 시간을 맞춘 결과다. 연습실은 베이스 연주자 고검재(35)씨가 운영하는 서울 양재동의 녹음 스튜디오. 밴드가 고씨에게 내는 연습실 사용비는 따로 없다. 고씨는 “내가 속한 밴드가 연습하니까 따로 금전 거래는 없다”며 “단장님이 종종 보면대나 프린터 같은 물품으로 지원해 주신다”고 말했다.

 지난해 5월 밴드에 합류한 바리톤 색소폰 연주자 천종성(33)씨는 대전에 거주한다. 천씨는 “연습실 오가는 게 힘은 들지만 빅 밴드 무대에 서는 건 꿈을 이루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학생들에게 색소폰을 가르치는 천씨는 “새벽 5시 넘어야 대전에 돌아오다 보니 금요일 오후까진 레슨 일정을 아예 잡지 않는다”고 말했다.

 천씨처럼 홍 단장의 열정을 믿고 따라주는 멤버들은 한 명, 한 명 개성이 넘친다. 흔치 않은 여성 트럼펫 연주자인 강리정(26)씨는 ‘군필녀’다. 고등학교 때 밴드부 활동으로 트럼펫을 처음 접한 뒤 학비를 모으기 위해 하사로 군에 입대했다. 군악대로 3년간 활동하다 전역한 뒤 2009년 음대에 입학해 트럼펫을 전공하고 있다. 전속 보컬로 활동 중인 박라온(34)씨는 2집 앨범까지 낸 솔로 가수다. 박씨는 “2007년 이 밴드 공연을 보고 매료돼 곧바로 홍 단장님을 찾아갔더니 악보를 구해오라고 하셨다”며 “너무 같이 하고 싶어서 사비를 들여 악보를 잔뜩 사들고 갔더니 멤버로 받아들여 주셨다”고 말했다.

 또 다른 트럼펫 연주자 김예중(38)씨는 지난 9월 서울 마포구 합정역 인근에 재즈바를 오픈한 사장님이다. 김씨의 재즈바에선 술과 담배가 금지다. 아이들도 부모들과 함께 찾아와 재즈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다. 김씨는 “얼마 전 클래식 피아노를 전공하는 열네 살 여학생이 어머니와 함께 와보고는 ‘앞으로 재즈 들으러 올 곳이 생겼다’고 기뻐하는 걸 들으며 너무 뿌듯했다”고 말했다.

열정을 더해주는 사람들

 ‘가난한 빅 밴드’에 앨범 발매와 충무아트홀 대관 공연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1집 앨범 발매를 위해 색소폰 두 대를 팔았던 홍 단장은 이번 2집 앨범 제작 때도 1600만원짜리 악기를 팔았다. 이런 홍 단장의 열정에 반해 서솔재오를 조건 없이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다. 부동산 자산운용회사인 퍼시픽애셋어드바이저스 이훈근(54) 대표도 그중 한 명이다. 이 대표는 지난해 문화일보홀에서 열린 서솔재오 공연에 지인 부부 5쌍을 초대했다. 너무나도 재밌게 공연을 본 이 대표는 공연이 끝나자마자 서솔재오 앨범 40장을 구매했다.

 이 대표는 “멤버 모두 실력으론 다른 밴드 활동하고 강의하며 살아도 되는 사람들”이라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재즈 빅 밴드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자기 돈과 시간을 들이는 열정에 감동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이번 충무아트홀 공연장 대관을 비롯해 여러 무대에서 서솔재오가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줬다. 이 대표뿐 아니다. 공연을 마치고 찾아와 “음악이 너무 좋아 최대한 도움을 주고 싶다”며 현금인출기에서 갓 찾아온 100만원을 주고 간 관객도 있었다고 한다. 홍 단장은 “이런 분들 덕분에 빅 밴드 하는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2003년 서솔재오가 호흡을 맞춘 이래로 올해가 딱 10년째다. 그동안 자라섬 국제재즈페스티벌, 일본 다카쓰키 재즈페스티벌 등 크고 작은 무대에 서왔다. 하지만 여전히 ‘재즈 빅 밴드 서울솔리스트재즈오케스트라’는 대중에게 생소하다. 새로 발매된 2집 앨범 ‘팔도유람’에 수록된 12곡은 ‘눈물 젖은 두만강’ ‘남행열차’ ‘부산 갈매기’ 등 이미 대중에게 익숙한 곡을 빅 밴드 재즈 선율로 재편곡한 것들이다. ‘원래 유명한 곡들을 편곡해 쉽게 어필하려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홍 단장은 “이번 앨범엔 예술성뿐 아니라 대중성도 강조했다. 일단 빅 밴드를 널리 알리는 게 급선무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아무리 훌륭한 연주 실력을 갖춰도 대중에게 생소하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홍 단장의 오랜 고민의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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