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나] 송승환 연극인·공연기획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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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로 소설을 즐겨 읽는다. 신간 소설이 나오면 책방으로 가는 이유는 소설 속에서, 내가 살아보지 않은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남의 인생에 가장 크게 공감하고, 주인공이 바로 나라는 생각에 빠져 내 인생을 깊이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어준 것은 희곡이다.

바로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The Glass Menagerie) 』(범우사) 이다.

물론 이 책은 내가 배우로서 연기하기 위해 수백 번 읽고 처음부터 끝까지 아예 다 외웠지만 꼭 배우가 아니더라도 희곡을 읽어보지 않은 분들께 권하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나는 이 책의 몇 구절을 10대 때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서 처음 접했다. 그리고 1983년 20대 때 이 책의 주인공 톰 역할을 맡으면서 제대로 읽게 되었다.

당시 나름대로 TV, 영화, 연극무대에서 활동하며 소위 '스타' 소리를 듣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화려한 생활이었지만, 가슴 한구석은 늘 답답했고, 넓은 바깥세상에 대한 갈망이 크던 때였다.

집안은 부모님의 우환과 사업실패로 어려웠고 그래서 무작정 넓은 세상으로 떠나고 싶던 시절 나는 정말 '유리 동물원' 의 주인공 톰이었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자전적 작품이기도 한 이 희곡은 44년 12월 시카고에서 초연되고 45년 3월 드디어 뉴욕에서 막을 올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작품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식들에 대한 기대감과 과거의 화려한 시절의 추억만 되새기고 사는 어머니 아만다, 유리동물을 모으며 집안에 갇혀 사는 누이 로라, 사랑하는 어머니와 누이 로라를 두고 꿈을 찾아 떠나고 마는 톰.

나는 정말 톰처럼 85년 한국을 떠나 뉴욕으로 훌쩍 떠났었고 세상 구경을 두루 하며 돌아다녔다.

1997년 유리 동물원을 재공연 하면서 40대가 되어 유리동물원의 톰을 다시 만났다. 이제는 느긋하게 톰을 만날 줄 알았던 나는 당황스러웠다. 여전히 나는 20대의 톰처럼 방황하고 있었고, 꿈을 좇아 다른 세상으로 떠나가고 싶었다.

아마 60이 되고 70이 돼도 나는 '유리동물원' 의 톰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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