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달콤한 인생'서 열연 이병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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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비린내 나는 누아르 영화 ‘달콤한 인생’은 이병헌을 위한 영화다. 그는 냉전과 열정의 두 얼굴을 매끈하게 소화했다. 김성룡 기자

"이 새끼, 끝까지 멋있으려고 하네."

자신을 죽이려는 수십 명의 조직폭력배에 둘러싸인 선우(이병헌)가

눈에 힘 주며 "사람 목숨 갖고 장난치지 마라"고 훈계하자 조직 내 라이벌인

문석(김뢰하)은 이렇게 비아냥거린다. 이 한 문장, 여기에 총질이 난무하는

누아르 액션영화 '달콤한 인생'(4월 1일 개봉)의 모든 게 담겨 있다.

"쿨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김지운 감독의 바람대로 이 영화는 쿨한 영상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맘 먹고 폼 잡은 액션이나 인테리어 잡지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도시적이고 세련된 세트는 물론, 삭막한 서울의 터널 속조차도 '달콤한 인생'에선 쿨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그 어떤 것보다 쿨한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이병헌(35)이다. 한 순간의 흔들림 때문에 보스로부터 내팽개쳐져 날개 없이 추락하는 조직의 2인자 선우 역의 이병헌은 혼자서 영화의 90%를 채우며 매력을 발산한다. 강렬한 인상의 진흙 구덩이 탈출 장면이나 불 각목 싸움 장면 등 액션은 물론 흔들리는 내면 묘사까지, '달콤한 인생'은 그야말로 이병헌을 위한 영화다. 영화의 대전제도 "선우가 정말 폼 나야 한다"는 것이었을 정도니-.

돌이켜보면 참 우습다. 그렇게도 멋진 캐릭터를 원했던 과거에는 오히려 폼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 돌아온 건 '멋있다'는 찬사가 아니라 '겉멋 부린다'는 비난과 그에 걸맞은 흥행 부진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달라졌다. '내 마음의 풍금'과 '공동경비구역 JSA''번지점프를 하다' 등은 이병헌이 스쳐가는 청춘스타가 아니라 오래 남을 연기자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들었다. '달콤한 인생'은 이렇게 달라진 이병헌의 자신감이 배어 있는 영화다. 멋지게 보이겠다는 강박 때문이 아니라 영화를 위해 진짜 멋지게 연기할 수 있다는 그런 자신감.

"전에는 시나리오를 읽어도 내 역할만 눈에 들어왔어요. 그 역할이 멋지면 하고 아니면 안 하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캐릭터가 아니라 이야기 전체를 보게 되더라고요. 시나리오와 감독이 좋다면 장르도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이번엔 감독의 영향이 컸어요. 김 감독 영화를 워낙 좋아하거든요."

그러나 막상 김 감독과 일하면서 많이 부딪혔다.

"누아르라는 형식 자체가 사실주의와는 좀 거리가 있잖아요. 김지운 감독 스타일도 그렇고. 그런데 전 사실적인 연기로 캐릭터에 생명력을 넣을 수밖에 없으니 스타일리시한 연출과 상충하는 부분이 많았죠."

아무리 얘기해도 감독은 "그래도 그렇게 해봐"라고 고집하고 그럼 이병헌은 "일단 내가 원하는 대로 찍을게요"라고 맞서는 식이었다. 그래서 이 장면은 이병헌 식으로, 또 저 장면은 김지운 식으로 선택됐다. 어쨌든 이병헌이 가장 멋있게 나온 장면으로 말이다.

그런데 정작 이병헌 본인의 마음에 드는 장면은 멋지게 총을 쏘거나 이틀을 꼬박 정말 "뒈지겠다" 싶을만큼 고생하며 찍은 구덩이 장면이 아니라 탈출에 성공한 선우가 총기밀매업자를 찾아가는 다소 밋밋한 장면이다.

"나라도 총싸움하는 한국영화는 안 볼 것 같아요. 관객이 영화에 착 달라붙어 공감대를 형성해야 하는데 한국에서 총질하는 영화가 얼마나 공감대를 주겠어요. 그런데 이 장면에선 선우가 총에 대해 낯설어 하거든요. 주인공조차 낯설어 하는 느낌, 그걸 통해 관객들의 공감대를 형성할 것 같아서 맘에 들어요."

그래도 한국에서 누아르라는 장르가 얼마나 통할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그의 이름값에 기대 일본에 320만 달러에 팔린 데 대해 부담은 없을까.

"흥행이 안되면 어떡하나, 그래서 내게 스타성이 없어지면 어떡하나, 그런 걱정이나 불안감을 갖기에는 이 일을 너무 오래 한 것 같아요. 이제는 좀 초연해졌다고 할까. 사람 사는 게 뭐 그런 거 아닌가요. 다 팔자인데…."

팔자. 이병헌은 의외로 이 말에 무게를 뒀다.

"이렇게 오래 연기를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데뷔할 때만 해도 이게 내 인생의 경험이 되겠구나, 그렇게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이 세계 안으로 뛰어들고 보니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폼만 잡는 직업이 아니구나. 내 인생을 다 바쳐서 해볼 만한 직업이구나, 뭐 그런 거."

안혜리 기자 <hyeree@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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