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경제 view &

‘구리 박사’가 죽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10면

이성한
국제금융센터 원장

원자번호 29번 Cu, 우리에게 동(銅)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구리의 원소기호다. 이 붉은색 금속이 금융시장에서 차지하고 있는 존재감은 자연과학의 세계와 사뭇 다르다. 바로 경기선행지표로서의 역할이다. 원자재는 실물경기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종종 세계경기의 바로미터 역할을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구리에 주목하는 이유는 광범위한 용도 때문이다. 구리는 전기와 열이 잘 통하고 잘 부식되지 않는 성질이 있어 전기전자, 통신, 자동차, 철도, 선박, 항공, 건축, 기계 등 쓰이지 않는 곳이 거의 없는 팔방미인이다. 이런 까닭에 구리 수요가 늘어나고 가격이 상승하면 경기가 곧 좋아질 것이라는 신호로 해석된다. 반대의 경우라면 불황을 예상할 수 있다. 금융시장에서는 구리의 이와 같은 경기 예측력을 높게 평가해 ‘구리 박사(Dr. Copper)’라는 별칭을 붙여주고 있다.

 실제로 구리의 경기예측능력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뒤이은 경기회복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2008년 4월 t당 8700달러까지 오르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던 구리 가격은 이후 폭락세로 돌변하며 그해 연말 3분의 1 토막이 났다. 다가오는 경기침체의 예고편이었다. 그러나 2008년 12월 2800달러를 바닥으로 구리 가격은 반등하기 시작했고 이듬해 연말에는 7000달러를 회복했다. 각국의 강력한 부양책에 힘입어 2009년 하반기부터 회복세를 나타낸 세계경제 흐름을 예견한 셈이다.

 한편에서는 구리 박사의 경기예측능력이 예전에 비해 많이 떨어졌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프랑스 투자은행인 소시에테제네랄은 2011년 11월 ‘구리 박사는 죽었다(Dr. Copper is dead)’라는 보고서에서 구리 가격의 경기 선행성이 최근 약화됐다고 주장했다. 중국 제조업 구매자관리지수(PMI)와 상관관계를 분석해 보니 때때로 경기에 후행하더라는 것이다. 구리 수요의 상당 부분이 제조업체가 아닌 투기 목적을 지닌 금융권에서 유입하고 있기 때문에 구리 가격 움직임이 경제의 체력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실수요와 무관한 투기자금이라는 약물이 투입되면서 현명하고 똑똑한 구리 박사가 분별력을 상실한 하이드씨로 돌변했다는 시각이다. 국제원유시장이 대규모 투기자본의 유입과 지정학적 리스크 등으로 펀더멘털 과 무관한 요인에 휘둘리면서 유가의 경기예측능력이 과거에 비해 떨어진 전철을 밟고 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일부의 이 같은 주장에도 경기 가늠자로서 구리의 역할은 여전히 유효하다. 구리의 예측능력에 다소간의 변화는 있겠지만 구리는 여전히 실물경기에 민감한 대표적인 원자재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투자자가 향후 경기에 대한 바로미터로 구리 가격을 주시하고 있다. 구리 박사에게 사망을 선고한 소시에테제네랄마저 사망 선고 직후인 2011년 말에 향후 경기가 회복될 가능성이 크다며 구리 매입을 권고하기까지 했으니 구리 박사의 예언을 마냥 무시해서는 안 될 일이다.

 올 들어 구리 가격은 전형적인 박스권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8000달러를 중심으로 등락을 반복하며 상승과 하락이 모두 제한되고 있는 것이다. 구리 박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향후 세계경제가 좋아지지도, 그렇다고 크게 나빠지지도 않는 상황이 연출될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구리 박사가 보여주고 있는 복합적인 시그널을 살펴보면 마냥 우울한 분위기에 휩싸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년 세계 구리 수요가 회복세를 나타낼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골드먼삭스는 내년 전 세계 구리 수요가 4.5% 늘어나며 0%에 그쳤던 올해보다 크게 개선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전 세계 수요의 40%를 차지하는 중국의 수요가 조만간 바닥을 치고, 미국을 비롯해 경기부진에 빠져 있는 여타 신흥국의 수요도 회복세를 보일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지금 현재는 비록 박스권에 갇혀 있지만 내년에는 구리 박사가 세계 경제의 회복시각에 손을 들어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다만 지금으로서는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는 예상에도 불구하고 유럽 재정위기와 미국 재정절벽 등 하방리스크 요인 때문에 선뜻 한쪽으로 손을 들어주지 못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미국과 중국의 경기지표가 일부 호전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성한 국제금융센터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