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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교수, 한국 근대계몽기 특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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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노르웨이의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러시아 출신 한국인 박노자 교수. 방학을 이용해 잠시 귀국한 그가 대학원생과 일반인 등을 대상으로 한국 근대사 특강에 나섰다.

1월 6일부터 11일까지 '박노자와 함께 하는 근대계몽기 탐사'를 강의한다. 최근 몇년 동안 집중 연구해 온 구한말 조선의 역사와 지식인에 대한 성과물을 조금씩 털어놓는 자리다.

서울역 부근에서 박교수를 만나 함께 지하철 4호선을 타고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있는 일종의 대안학교인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로 갔다. 그의 특별강좌가 마련된 곳이다. 지식에 대한 갈망 때문일까. 10평 남짓한 강의실은 그를 기다리는 수강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근대적 가치에 대한 성찰은 국내외 인문학계의 핵심적 화두고 그것은 한국의 현실에서 근대의 여명기인 구한말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박교수는 조만간 중앙일보를 통해 '우리 안의 1백년, 우리 밖의 1백년'이란 제목의 시리즈도 선보일 예정이다.

환경오염으로 숨막히는 서울의 공기까지도 사랑하고 싶다는 박교수는 자신의 저서 '당신들의 대한민국'에 대한 불만부터 토로했다. '당신들의'라는 수식어가 붙은 제목 때문이다.

단순히 한국말만 유창하게 구사해서가 아니라 한국학 연구자로서 한국인과 운명을 같이 하고자 마음먹은 그를 여전히 이방인으로 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박교수의 강의는 조심스럽게 진행됐다. 무엇보다 자신의 결론을 먼저 내려놓고 오늘의 시각을 과거에 들이미는 방식을 거부했다. 이를테면 미국.일본.러시아 등 열강에 대한 구한말 지식인들의 대응을 오늘의 잣대로 친미파다 친일파다는 식으로 비판하지 않고 우선 그들이 처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독립신문'을 만든 서재필.윤치호.주시경과 신채호.박은식.장지연 등 구한말의 대표적 지식인들이 그의 첫 날 강의에서 많이 거론됐다.

유교적 지식을 어릴 때부터 체득해 조선의 마지막 선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면서, 또한 서구적 근대에 무방비로 노출되면서 그것을 돌파하기 위해 서양의 지식을 흡수한 첫 근대인이랄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근대 계몽기 지식인들이 치열한 지적 모험을 펼치며 조선의 부국강병을 위해 힘썼던 다양한 실천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둘째날엔 '근대 사회진화론의 전개'에 대한 강의가 이어졌다. 당시 조선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친 중국의 개화파 지식인 양계초의 "가장 추한 노예는 옛사람의 노예다"란 말은 당시의 시대 배경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과거 성현의 말씀을 가치 서열상 현재보다 우위에 뒀던 유교적 세계관의 종말을 고하는 선언이다.

당시에 개화는 진화론에서 말하듯 변화에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는 적자생존의 논리로 해석됐다. 하지만 절대적 존경의 대상이었던 옛 성현을 배제한 뒤에 오는 세계관의 공백이 문제로 대두됐고, 그 공백을 국가가 채워나가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국가를 절대화하는 국민국가의 논리가 탄생했다고 박교수는 말했다.

이같은 지적은 한국 초기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등 근대적 양상들이 일본을 모방하고 또 일본에 저항하는 가운데 형성되기도 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조선의 개화파 지식인들의 사상과 실천에서부터 태동하고 있었다는 해석이다.

개화기 지식인들의 삶과 문학을 연구하는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의 고미숙 박사는 강의가 끝난 후 "박노자 교수의 언어 습득 능력과 텍스트 소화 능력, 그리고 방대한 지식의 암기력은 놀랄 만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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