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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너무 쉽게 하는 말 “당신을 이해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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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소설가 이혜경은 “사는 건 ‘개그콘서트’인데 소설은 ‘100분 토론’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고 했다. 남들이 스무 살 때 깨닫는 걸 지금 알게 될 정도로 철이 덜 들었다는 그는 “내 마음이 변하는 걸 보며 인간 탐구를 한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책장을 찬찬히 넘길 수밖에 없었던 건 지루해서가 아니었다. 치밀하게 짜인 이야기 속에 도사린 오싹한 관계의 전말이 궁금해 조바심이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되새김질하듯 조금씩 음미하며 읽어야 했다.

 소설가 이혜경(52)이 6년 만에 내놓은 소설집 『너 없는 그 자리』(문학동네)는 그랬다. 끓어오르지 않지만 잔잔한, 그리고 단정한 그의 문체는 마치 반전처럼 소설의 진폭도 키웠다.

 과작(寡作)의 작가라는 평처럼 책에 실린 작품은 지난 6년간 쓴 9편의 단편이다. 오래 가다듬고 공들여 꾹꾹 눌러 쓴 느낌이 배어 나왔다. 그래도 작품을 내놓는 속도가 더딘 이유가 궁금해 그를 만났 다.

 “2006년 말부터 한동안 소설을 쓰지 못했어요. 말에 대한 믿음을 잃는 시기가 있는 데 이때가 그랬어요. 세상에서 하는 말과 실제 세상이 너무 차이가 커서요.”

 말에 너무 엄정한 게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도리질을 쳤지만 아니긴. 작품을 쓸 때마다 7~8번이나 퇴고를 한다면서. 꽉 찬 그의 글이 어떻게 나오는지 이해가 됐다. “이번에는 덜 한 거에요. 독자를 너무 힘들게 하는 것 같아서요. (문체를) 많이 흔들려고 노력하고 있는 데 그래서 갈팡질팡하고 있어요.”

 그가 자신을 조금 덜 볶고 조금은 편하게 글을 쓰겠다는 마음을 먹은 건 다 이유가 있다. “최근 1~2년 동안 몸이 좀 아팠어요. 그러다 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될지도 모르는 데 잘 쓰려다 못 쓰고 죽으면 창피하겠단 생각이 들어 속도를 좀 내려고요.”

 이번 책에 실린 작품에는 인간 관계 속에서 엇갈리고 어긋난 감정의 흐름, 그로 인한 관계의 삐걱댐과 배신, 그에 따른 상처가 그려진다.

 “사람들이 ‘나는 너를 이해한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한다고 생각해요. 사실 가장 발끈하는 부분은 ‘일방적인 선의’에요. 상대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정작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죠. 받은 사람의 결정권을 빼앗는 폭력이 될 수 있는데도.”

 어찌 보면 배신은 상대의 입장에서 보면 오해나 착각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각자의 입장이 있어요. 어찌 보면 각자가 가진 자신의 필터로 세상이나 감정을 받아들이는 거죠. 그런 방어막이 없으면 민달팽이처럼 위험에 쉽게 노출될 수 있으니, 오해나 착각을 가져오는 필터가 살아 있는 것의 본능일 수도 있죠.”

 단편 속 인물들은 관계에 상처받고 그 후유증으로 관계를 망치는 악순환의 굴레에 쩔쩔맨다. “관계 속에 상처를 받았다면 그 책임은 나와 상대방에게 모두 있는 데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요. 남 탓을 해 편하지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거죠.”

 삶의 마지막 보루마저 빼앗긴 사람들의 고군분투도 그의 눈에 들어오는 이야기다.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도 없고 말할 힘도 없는 사람들에게 눈이 쏠린다는 설명이다.

 “꽃밭에 가면 나팔꽃이 분꽃을 닮으려 하지 않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남과 비교해서 따라가고 닮으려고 애쓰다 보니 태어난 대로 살지 못하는 거에요. 관습이나 제도, 가족 등도 억압하는 경우가 많죠. 사회의 본류는 두되, 지류도 존중하고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혜경=1960년 충남 보령 출생. 82년 ‘우리들의 떨켜’로 등단. 소설집 『그 집 앞』 『꽃 그늘 아래』 『틈새』. 장편 『길 위의 집』. 현대문학상·동인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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