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모크레스의 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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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7호 31면

고대 그리스 시라쿠스의 왕 ‘디오니소스’의 신하 다모크레스는 입만 열면 왕이란 자리가 얼마나 행복하겠느냐며 부러워하곤 했다. 어느 날 왕이 다모크레스에게 말했다. “그대가 그토록 부러워하는 왕의 자리에 하루만 앉아 보게나.” 왕의 호의에 감격하며 다모크레스는 왕좌에 앉았다. 눈앞에는 산해진미가 차려지고 주위에는 신하들이 읍을 하고 도열해 있는 중에 문득 눈을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니 머리 위에는 한 가닥 머리카락에 묶인 날카로운 칼이 매달려 있었다. 그 위험천만한 존재를 알아챈 순간부터 다모크레스는 환희도 감격도 다 잊은 채 공포에 떨며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미·소 간의 핵병기 삭감을 실현시켰던 소련의 외무장관 셰바르드나제가 ‘자기파괴 가능성’ 때문에 핵무기를 다모크레스의 검에 비유해 유명해진 일화다. 한 명의 진정한 기업가가 사업을 일으켜 성공시키는 과정 역시 이러한 ‘리스크’를 짊어지고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300년에 걸쳐 일본을 지배한 에도 막부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항상 스스로를 ‘불타는 집이나 가라앉고 있는 배에서 지휘하는 장수’에 비유하며 스스로를 단련시켰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지도자의 위치란 늘 이런 것이다. 바로 ‘리스크’를 짊어지는 용기와 결단이다. 정확히 30년 전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도 똑같은 ‘리스크’를 맞이하고 있었다. 반도체사업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기로였다.

1982년 10월 1일 ‘반도체 신규사업팀’이 이병철 회장의 지시로 삼성 내에 공식적으로 만들어졌고 당시 나는 사업계획 수립 실무자였다. 한국 정부도 걱정했고 일본의 경제계도 위험하다고 말리고 나섰다. 당시 그룹의 이익이 다 합쳐서 200억원을 넘지 않을 때 한 개 생산라인 시설투자액이 500억원에 육박하는 사업을 하겠다는 것이니 걱정할 만도 했던 것이다. 모두들 실패할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했다. 진정 어린 충고도 있었고 사업적 견제도 있었을 것이다. 하긴 지금이나 당시나 반도체사업의 별명은 ‘금식충(金食蟲) 산업’이었다. 돈 잡아먹는 산업이라는 말이다. 더 큰 문제는 일단 사업을 시작하면 망하기 전에는 투자를 멈출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반도체를 ‘외발자전거 산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83년 2월 8일(도쿄 구상) 이병철 회장이 메모리사업을 확정하기까지 약 4개월간 신규팀이 사업성 검토로 작성한 보고서가 아마 8t 트럭 두 대분은 될 것이다. 이병철 회장 스스로가 ‘다모크레스의 검’ 밑에 선 것이다. “아무리 이익이 많이 나도 해서는 안 되는 사업이 있고 아무리 적자가 많이 나도 해야만 하는 사업이 있데이. 반도체란 해야만 하는 사업인기라. 우리나라같이 자원이 부족한 나라에서 자손만대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원을 들여다 스스로 만들어 내다 파는 수밖에 없다. 마침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질 좋은 노동력과 우수한 두뇌자원이 많아 충분히 해 볼 만하다.” 일단 결심이 서자 83년 4월 생산제품 확정, 6월 기흥공장 발파식 등 진행이 초스피드로 이뤄졌다. 사업 착수 10년 만에 삼성은 세계 메모리사업을 제패하고 오늘까지 그 신화가 이어져 오고 있다.

이 신화는 이제 후발국가나 후발기업들이 산업화를 이루는 과정의 교과서로 알려져 있다. 만약 이병철 회장이 우리의 자본 부족, 설계기술 부족 등 부족한 것만을 걱정, 사업을 포기해 다모크레스의 검 밑을 피해 나왔다면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보기술(IT) 산업은 어떻게 돼 있을까? 우리는 여전히 일본의 전자제품을 베끼고 있거나 저급 부품 공급단지 정도에 만족하고 있을 것이다. 나눔을 강조하기 위해 경제민주화를 강조하는 것도 좋지만 메모리 이후의 신규 성장동력 제품을 찾기 위한 기업가들의 성장의욕을 꺾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일부 재벌그룹의 추악한 비리 뉴스를 접하니 이병철 회장의 ‘기업가 정신’이 더욱 빛난다.



김재명 부산 출생. 중앙고성균관대 정외과 졸업. 1978년 삼성그룹에 입사해 삼성전자 등에서 일했다. 저서로 『광화문 징검다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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