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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기업에 밀리는 사이버 영토 분쟁

중앙일보

입력

미래 온라인社 김인조(金仁照·33) 대표는 요즘 법률지식이 부쩍 늘었다. 아마존닷컴社(amazon.com)가 미래 온라인의 도메인네임 ‘amazon.ne.kr’을 상대로 한 서비스표권 등 침해금지 소송에서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직접 변론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도메인네임 전문 변호사를 찾기가 힘들 뿐만 아니라 총 직원수 9명인 소규모 벤처회사가 감당하기에는 변호사 선임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굴지의 변호사를 선임해 재판을 준비한 거대 다국적기업 앞에서 金대표의 변론은 거의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지난 7월 서울지방법원 북부지원에서 도메인네임 말소 판결을 받았다. 아마존닷컴과 비슷한 도메인네임을 사용해 유사한 영업을 함으로써 소비자들에게 혼란을 줬다는 원고측 주장이 인정된 것이다. 이에 대해 金대표는 미래 온라인은 인터넷 쇼핑몰 솔루션 업체로서 샘플로 만든 쇼핑몰을 웹에 진열했을 뿐 쇼핑몰을 운영해 돈을 벌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거의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내가 도메인 분쟁을 너무 쉽게 생각한 잘못도 있지만 한국인들이 국내 재판에서 번번이 패소하는 데는 정부의 도메인 관리 정책에 허점이 많은 탓도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kr’ 도메인네임 판결에서 다국적기업에 패소해 도메인네임을 쓰지 못하게 된 국내 업체로는 미래 온라인이 처음은 아니다. 1999년 10월 다인 인터내셔널이 프랑스의 샤넬社(chanel.com)가 제기한 소송에서 져 ‘chanel.co.kr’ 도메인네임 등록말소 판결을 받았다. 이후 2001년 5월까지 ‘.kr’ 도메인과 관련해 총 26건의 사건이 국내 법원에 회부됐다. 이중 외국상표가 관련된 사건은 54%였다. 전체 사건에서 기존 상표권자가 승소한 경우는 67%인데 비해 외국상표 관련 사건에서는 기존 상표권자가 85% 승소했다.

등록인의 국적에 관계없이 전세계 공통으로 쓸 수 있는 ‘.com, .net, .org, .edu’ 도메인의 경우 한국인의 등록건수는 1998년 7월 세계 16위에서 2001년 1월에는 5위까지 올랐고 지금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그러나 국가도메인 ‘.kr’은 2000년 12월 최고치인 51만여건을 기록해 세계 3위를 차지한 뒤 현재 매월 1만5천여건씩 감소하고 있다.

한국인터넷정보센터(KRNIC)의 주소관리팀 도메인정책과 권현준(權賢埈·36) 주임은 ‘.biz, .info, .name’ 등 새로운 일반도메인이 많이 생겼으며 거품경제가 걷히고 악의에 의한 선점이 줄면서 실질적으로 필요한 사람들만 도메인을 등록하게 됐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2000년 말부터 증가하고 있는 도메인네임 분쟁도 한가지 이유다. 상표권을 가지고 있는 기존 사업자와 도메인 등록자들 간의 도메인 분쟁이 증가하면서 도메인 등록자들이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도메인 분쟁에서 한국이 취약한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 마스터카드社(mastercard.com)가 제기한 소송에서 패소한 웹메일 손지협(孫志協·30) 대표는 분쟁 해결을 맡은 법조인들의 관심과 지식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그는 지난 3월 다국적기업으로부터 소송을 당한 7명의 벤처회사 대표들과 함께 ‘국내 도메인분쟁업체 연대모임’(KIDN)을 발족시켰다.

도메인 관련 법률이 미비한 상황에서 공정한 인터넷 관련법이 제정될 수 있도록 시민단체와 공동 변호인단을 구성하자는 취지에서였다. 그러나 회원들 모두 자신의 사업 경영과 소송 준비에 바빠 모임은 유야무야됐다. 그는 “국내 기업들은 도메인네임을 선점한 외국인들로부터 거금을 들여 도메인네임을 사오는 반면 내국인이 우선시돼야 할 ‘.kr’ 도메인은 우리가 먼저 차지하고도 외국 기업에 빼앗기고 있다”고 분개했다.

판례들에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논란도 있다. 도메인분쟁협의회 의장을 맡은 서울대 법학과 홍준형(洪準亨·45) 교수는 도메인 등록자가 기존 상표권자의 서비스 영역을 침해했다는 판단 기준이 모호하다고 지적했다.

‘viagra.co.kr’을 도메인네임으로 사용해 비아그라를 생산하는 미국 파이저社로부터 제소당한 경림마트의 최철동(崔喆東·50)대표는 1심에서는 승소했지만 현재 2심 판결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崔대표가 취급하는 건강식품은 의약품과 구별된다는 이유로 법적 제재를 받지 않았지만 판결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2심에서는 판결이 번복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오프라인 법을 도메인 재판에 적용하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崔대표는 “정보화 시대에서 도메인은 과거의 영토와 맞먹는 개념이기 때문에 그 성격을 재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KRNIC의 權주임도 “기존의 상표권을 갖고 있는 권리자들만 옹호할 수 없는 실정”이라는 입장이다. 현재 도메인 분쟁에서 주요 판결 기준은 상표법과 부정경쟁방지법이다. 이는 국제적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는 통일도메인이름분쟁해결제도(UDRP)의 기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UDRP는 영·미법을 따른다. 다수가 영·미계인 기존 상표권자들이 인터넷상에서도 우위를 차지하게 되면 후발 개도국들이 균등한 경쟁 기회를 잃을 수 있다고 權주임은 설명했다. 서울여대 언론영상학과 우지숙(禹志淑·34)교수도 ‘국가 최상위 도메인이름에 대한 분쟁해결’이라는 논문에서 특별한 법익이 침해된 경우가 아니라면 도메인 등록인의 권리가 충분히 보호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정경쟁방지법과 도메인 관련 규정이 충돌한 대표적인 예가 먼저 등록된 도메인을 정식으로 인정해준다는 KRNIC의 ‘선등록, 선처리의 원칙’이다. 샤넬 사건을 담당한 이흥기(李興基·서울지방법원 제12민사부)판사는 ‘선등록, 선처리의 원칙은 KRNIC이라는 단체의 방침에 불과하므로 일반 법률질서를 위반한 경우까지 적용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대해 서울대 洪교수는 현재로서는 기존 상표권자들의 권리를 먼저 보장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라며 “다만 대기업들이 위세를 휘두르는 것만은 막을 수 있도록 공정성을 기해 분쟁조정 제도를 만들 필요는 있다”고 말했다.

아직까지 도메인 관련 법규를 새로 제정하려는 움직임은 없다. 다만 정부가 주도해 점증하는 도메인 분쟁을 해결하려는 의지는 엿보이고 있다. 1차적으로 정부는 고의적 도메인네임 선점을 방지하기 위해 지난 7월 상표법과 부정경쟁방지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또 국내 도메인을 대상으로 도메인 분야 전문가 9명으로 구성된 ‘도메인이름 분쟁조정위원회’(의장·경찰대 법학과 장문철 교수)가 올해 말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할 예정이다.

이 위원회는 ‘도메인분쟁협의회’의 1년간 이론적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도메인 분쟁을 효율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구성됐다. 도메인이름 분쟁조정위원회에서는 분쟁사건을 온라인으로 처리해 재판에 드는 시간과 비용이 절약된다. 또 법률 지식·경험이 풍부한 전문가들로 구성돼 전문성 부족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며 조정 사례가 많이 모이면 법제화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아울러 분쟁을 사전 방지할 수 있도록 도메인 등록자들을 교육하고 분쟁 우려가 있는 도메인을 등록하지 않도록 유도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미래 온라인의 金대표는 이런 조치들을 환영한다. 도메인네임을 선점해 큰 돈을 만져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는 그는 “별 생각없이 등록한 도메인 때문에 소송에까지 휘말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번 기회에 도메인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고 말했다. 소송을 당한 뒤에야 도메인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사례가 앞으로는 과연 줄어들 것인지 의문이다.

김 혜 수
자료제공 : 뉴스위크 한국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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