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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고 차갑게 러시아의 야성 한바탕 휘몰이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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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호 24면

국내 클래식 공연계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실험이었다. 11월 6일과 7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마린스키극장 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 얘기다. 예술감독 게르기예프가 지휘봉을 잡고 손열음과 조성진이 각각 협연한 양일간 교향곡 2곡과 협주곡 1곡씩을 기본으로 배치했다. 모두 밀도 높은 곡들이어서 정보량이 푸짐한 콘서트였다. 게르기예프는 지휘대 없이 무대 위에 서서 이쑤시개만 한 지휘봉을 오른손에 쥐고 흔들었다.
첫날 첫 곡은 아나톨리 리아도프의 ‘바바 야가’. 슬라브 민담의 마귀할멈을 묘사한 관현악곡이다. 지나가는 새처럼 목관악기가 첫 음을 알렸다. 왼편에 위치한 더블베이스 주자들이 묵직한 어둠을 피워냈다. 관악기는 선명하게 부각됐다. 파르르 떠는 게르기예프의 손끝에 양날개로 포진한 바이올린 주자들의 활이 반응했다.

마린스키극장 오케스트라 내한공연 관람기

한 음도 소홀히 다루지 않은 손열음
밝은 붉은색 드레스를 입고 손열음이 나왔다. 객석의 긴장을 깨는 첫 음부터 자신감을 내비쳤다. 한 음도 소홀히 다루지 않고 음의 이행이 신속했다. 적극적이면서도 유연했다. 마린스키극장 오케스트라의 반주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연마된 듯한 현악군의 소리는, 특히 첼로 음이 불순물 없이 고급스럽고 풍윤했다. 게르기예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자신만의 악단을 자신만의 사운드로 닦고 조이고 기름쳐 놓았던 것이다.

2악장에서는 고조되는 현과 피아노의 어우러짐이 볼 만했다. 파질 세이의 편곡 작품이나 카푸스틴 등 재즈적 이디엄에 익숙한 손열음은 3악장의 흐름에서 뚜렷한 주도권을 쥐었다. 4악장에서 그녀의 피아노는 트럼펫을 확고한 조연으로 만들었다.

이어진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5번. 손을 터는 게르기예프의 동작은 그대로 음악으로 찍혀 나왔다. 서두르지 않고 타악기의 신랄함을 고스란히 살렸다. 어두우면서도 투명한 고해상도의 사운드였다. 트롬본이 정확한 음을 토해냈고, 스네어드럼의 음량이 커서 깜짝 놀랐다. 총주에서 부풀어 오르는 음색이 찰졌다. 2부의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은 기대에 못 미쳤다. 후반부로 갈수록 오케스트라의 피로감이 눈에 띄었다. 금관은 마치 얼어붙은 듯 겉도는 느낌이었다.
7일 공연은 곧바로 브람스 교향곡 2번으로 시작했다. 호른의 실수에 이어 관악군이 답답한 소리를 냈다. 앙상블은 점차 둔중하고 묵직해져 나중에는 질질 끌었다. 관과 현이 엉킬 때가 많았다.

협연자 조성진이 등장하면서 분위기는 반전됐다. 프로코피예프의 단악장 협주곡인 1번에서 조성진은 사납게 몰아치는 타건에서 끝이 둥근 음색을 빚어냈다. 맹렬한 전개였다. 힘과 속도, 패기가 전면에 나서며 러시아의 야성이 고개를 들었다. 프랑스에서 미셸 베로프에게 배우고 있는 조성진은 더욱 야무지고 폭이 넓어졌다. 게르기예프도 만족했는지 조성진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 앙코르는 ‘로미오와 줄리엣’ 중 ‘캐풀렛과 몬터규’. 서정적인 부분에서는 왠지 프랑스의 감성이 느껴졌다.

손끝으로 곡 흐름과 맥 짚는 게르기예프
마린스키극장 오케스트라는 2부의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5번에서도 기세를 이어갔다. 저음이 기반이 된 관과 현의 블렌딩은 어두우면서도 광채가 났다. 소리가 층층이 쌓이고 게르기예프는 당당하게 손끝에서 곡의 흐름과 맥을 짚었다. 2차대전의 포격소리 같은 음량이 압도적이었다. 2악장은 러시아의 벌판을 질주하는 듯 신랄한 스케르초였다. 고급스러운 중저음이 깔리고 타악기의 울림이 투명했다.

서정적인 주제가 어둡게 부풀어 오른 3악장에서는 터져나갈 듯한 음량, 찢어질 듯한 공의 울림에 이어 느리고 장엄하게 마무리됐다. 4악장에서도 전날의 피로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화려한 피날레에서는 어느새 지휘봉 없이 맨손이 된 게르기예프의 볼살이 떨렸다. 지휘자는 금관군과 목관군을 일으켜세우며 만족을 표시했다.

이날 앙코르가 절품이었다. 차이콥스키 ‘호두까기 인형’ 중 그랑 파드되. 첼로가 리드하는 부드러운 중저역과 천상의 하프 소리가 녹아들었다. 이는 점차 고조되며 작품을 형언하기 힘든 백열적인 상태로 몰고 갔다. 러시아적인 본성이 숨김없이 드러났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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