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거니 뒤서거니 ‘판박이 정책’ 홍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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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호 06면

#7월 17일. 박근혜 후보가 대구 안일초등학교를 방문했다. 박 후보는 “고등학교 무상 의무교육을 위해 교육기본법을 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2014년부터 매년 고등학교 학비를 25%씩 줄여 2017년엔 전액 무상교육을 실현하겠다는 거다. 또 박 후보는 3000여 개에 달하는 대입전형 수를 지적하며 “수시는 학생부 위주, 정시는 수능 위주로 누구나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전형을 대폭 줄이겠다”고 말했다.

2012 대선 공약 베끼기 ‘트라이앵글’

#10월 8일. 문재인 후보가 경기 성남시 보평초등학교를 찾았다. 문 후보는 “고교 무상교육을 단계적으로 실시하겠다”고 다짐했다. 또 “현행 대입제도는 초·중등 교육을 왜곡시키고 창의·인성교육 실현을 제약하는 가장 큰 원인”이라며 “대입전형을 단순화시키겠다”고 덧붙였다.

#11월 1일. 안철수 후보가 캠프 사무실에서 교육개혁 공약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안 후보는 “공교육이 죽고 사교육이 활개친다”며 대입전형은 수능과 논술, 내신, 입학사정관 전형의 네 가지로 간소화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고교 무상교육을 실시하겠다. 특성화 혁신대학, 정부책임형 사립대는 수능 없이 내신과 심층면접만으로 학생을 선발하겠다”고 약속했다.

고교 무상 교육과 대입전형 단순화는 세 후보의 공통된 공약이다. 특히 고교 무상 교육은 박 후보가 먼저 발표하긴 했지만 민주당은 저작권을 주장한다. 박 후보가 고교 무상 교육을 발표한 이틀 뒤인 19일 최재천 민주당 제5 정조위원장은 “공약으로 발표할 게 아니다”라고 반격했다. 그는 당 고위정책회의에서 “고교 무상 의무교육을 위한 교육기본법 개정은 민주당의 총선 공약이자 이미 제출한 법안이니 지금 당장 합의해 실천하면 될 일”이라고 주장했다.

여야 모두 ‘미투이즘’ 전략 비판 받아
박근혜·문재인·안철수 세 후보의 정책은 판박이다. 약간의 시차가 있지만 조금씩 닮아간다.

먼저 의혹을 받는 주자는 출마 선언이 늦은 안철수 후보다. 박근혜 캠프의 고위 정책담당자는 “안 후보가 내놓는 정책들을 보면 다른 당의 정책을 베끼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안 후보 쪽 생각은 다르다. 안철수 캠프 관계자는 “엄마, 아빠란 단어가 아무리 익숙해도 안 쓸 수 없듯이 아무리 익숙한 정책이라도 중요하다면 점진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고 반박했다. ‘베끼기’ 의혹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대꾸할 가치가 없다”고 일축했다.

하지만 ‘공약 베끼기’ 논쟁은 안철수 후보가 공식적으로 등장하기 전인 올해 초에 시작됐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경제정책에서 복지·교육정책까지 엇비슷한 정책을 총선 공약으로 쏟아내면서부터다. 당시 여야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반복하며 ‘미투이즘(me-tooism·모방주의)’ 전략을 취했다. 민주당이 군 복무자에게 매달 30만원의 사회복귀지원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공약으로 내놓자 새누리당은 사병 월급을 최대 40만원까지 올리자며 맞불을 놨다. 새누리당이 정년을 60세로 연장하겠다고 약속하자 민주당은 ‘정년 60세’ 입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당시 민주당은 “새누리당이 지키지 못할 공약을 남발하고 민주당 정책을 베끼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지난 대선 때 이명박 대통령이 공약한 뒤 반향이 컸던 반값 등록금 이슈를 놓고도 후보들은 모두 한목소리다.

민주당은 19대 국회 개원 첫날인 5월 30일 반값 등록금을 민생 법안으로 제출해 신호탄을 날렸다. 그동안 반값 등록금 공약에 회의적이던 박근혜 후보가 즉각 반응했다. 8월 23일 김상민 새누리당 의원 주최로 열린 반값 등록금 관련 토론회에 참석한 박 후보는 “반값 등록금을 반드시 해내겠다. 반값 등록금은 새누리당의 당론”이라고 언급했다. 9월엔 이명박 대통령과 만나 반값 등록금 정책을 건의했다.

박 후보의 적극적 행보에 다른 두 후보도 반값 등록금 관련 입장을 잇따라 밝혔다. 지난달 3일 문재인 후보는 온라인 여성모임 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집권하면 2013년부터 국·공립대학 반값 등록금을 실현하고 다음 해엔 사립대까지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1일 안 후보도 교육정책을 발표하며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모든 국·공·사립대를 상대로 반값 등록금을 실현하겠다”고 공언했다.

경제민주화 말싸움 속 각론 서로 비슷
세 후보가 대선 초반 공통적으로 주목한 경제민주화 화두에선 더욱 두드러졌다.
세 후보 중 경제민주화 이슈를 선점한 건 박근혜 후보였다. 7월 5일 경선캠프였던 ‘국민행복캠프’에 경제민주화 전도사로 불린 김종인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을 공동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같은 날 국회 경제민주화 포럼 창립식에 참석한 문재인 후보는 즉각 반격했다. 문 후보는 축하 연설에서 “재벌들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넘겨주는 줄푸세 정책은 경제민주화의 적이다. (박 후보가) 줄푸세를 고수하면서 경제민주화를 말하는 건 언어도단”이라고 공격했다. 그는 8월 자신의 정책 비전을 담아 출간한 책 사람이 먼저다에서도 ‘내가 이야기하는 경제민주화와 새누리당의 경제민주화는 실천과 의지 면에서 근본적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박 후보는 “야당 뜻대로 나가다간 재벌들 다 해체해야 한다”고 맞받았다.

뒤늦게 대선에 합류한 안철수 후보도 경제민주화 화두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달 14일 안 후보는 재벌개혁 공약을 발표하면서 “문 후보의 공약은 근본적인 재벌개혁이 아니다”라고 문 후보와 선을 그은 후 박 후보도 공격했다. 안 후보는 지난달 25일 서울 신도림동 디큐브시티 쉐라톤 호텔에서 열린 G밸리 CEO 포럼에서 “새누리당의 경제민주화 접근 방법은 잘못됐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중앙SUNDAY가 각 후보 캠프에서 받은 경제민주화 정책 답변서(10월 7일자 참조)를 보면 몇 가지를 제외하곤 일치하는 공약이 많았다. 골목상권 진출 제한, 불공정 행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 일감 몰아주기 금지, 비정규직 차별 철폐 등 경제민주화의 골간이 되는 내용에 대해선 차이가 거의 없다. 그동안 벌어진 치열한 설전이 무색할 정도다.
특히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의 정책은 경제민주화뿐 아니라 다른 여러 분야에서 큰 차이가 없다. 2일 문 후보가 밝힌 주거복지 정책도 안 후보가 지난달 25일에 발표한 내용과 어슷비슷했다. 세입자에게 1회 자동계약 갱신권을 보장하고, 공공임대주택 비율을 2018년까지 10%로 확대한다는 공약은 두 후보가 일치한다.

오바마와 힐러리도 베끼기 논쟁
공약 베끼기 논쟁이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해외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에선 지난 6월 2차 총선을 앞두고 옛 여당인 신민당이 2당으로 급부상한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의 ‘구제금융 조건 재협상’ 공약과 유사한 내용의 공약을 발표해 ‘공약 베끼기’ 논쟁이 벌어졌다. 2008년 미 대선에선 민주당 경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과 오바마 대통령의 기싸움이 있었다. 당시 클린턴 후보 측은 오바마 후보가 제시한 환경 일자리(그린 컬러) 500만 개 창출을 핵심으로 하는 경제공약이 자신들의 정책을 표절했다고 주장했다.

매니페스토실천본부 이광재 사무총장은 “공약은 현안을 해결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선거철이 다가올수록 비슷해질 수밖에 없다”며 “하지만 각 후보들이 자신의 특성을 살려 세부 실행안 마련에선 독창성을 살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오수길 정책자문위원은 “각 정당이 자신들의 정강 정책이나 가치 지향점을 반영해 공약을 만들지 못하고 표에 이끌려 다른 후보의 눈치를 보며 공약을 만들어내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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