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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는’ 것에서 ‘그리는’ 것으로 바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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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5호 28면

16세기 르네상스 이후 세계 미술은 프랑스를 기지로 삼아 시대별로 등장한 특정 화풍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세분하면 20여 개의 화풍이 있다. 고전주의, 로코코,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파, 야수파, 다다주의, 초현실주의, 입체파, 추상파, 팝아트 등이 커다란 줄기를 이뤘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다다·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맨 레이

다다주의는 미술뿐 아니라 예술 전 분야에 걸쳐 한때 세계 문화계를 휩쓴 문예조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5년부터 약 10년간 스위스·프랑스·독일·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반문명, 반합리성에 기초한 무정부주의적 성격의 문화운동이다. 1916년 2월 스위스 취리히 볼테르 카페에서 이름난 당대 전위예술가들이 모여 다다주의를 선포했다. 다다주의가 우연성을 표방한 행위예술을 지향하며 모든 것을 부정했지만 그 행위자는 부정하지 않는 모순을 범해 차차 초현실주의에 자리를 양보하게 됐다. 1920년대 초 프랑스에서 전성기를 맞은 다다주의는 ‘오브제’(Objet, 물체)를 사용했다. 남성 소변기를 눕혀 놓은 프랑스-미국 작가 마르셀 뒤샹의 ‘샘’(Fontaine)은 세계 미술계를 경악케 한 도전적 작품이었다. 구두, 자전거 바퀴 등도 ‘오브제’로 동원됐다. 독일-스위스 문인 후고 발, 루마니아 태생 유대인 화가 마르셀 양코, 독일 조각가 한스 아르프, 루마니아 출신 유대인 시인 트리스탄 자라 등이 유럽 다다시대를 대표한 인물들이다. 다다주의와 초현실주의를 아울러 섭렵한 천재 사진작가 맨 레이(사진) 역시 이 시대를 같이한 멀티 아티스트로 이름을 남겼다.

초기엔 주로 화가들 카탈로그 제작
레이는 1890년 이매뉴얼 라드니츠키라는 이름으로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러시아계 유대인이다. 소규모 의류점을 경영하던 아버지는 레이가 어릴 때 가족과 함께 뉴욕 브루클린으로 이사했고 성도 레이로 바꿨다. 레이의 집안뿐 아니라 이 시기 대다수 동유럽 출신 유대인 미국 이민 1세대가 반유대주의를 우려해 성을 영어식으로 고쳤다.

어려서 아버지가 만든 옷을 보고 자란 레이는 디자인과 패션 감각을 익혔다. 아버지는 레이가 건축 설계가가 되길 바랐지만 레이는 미술에 더 취미가 있었다. 그래서 1909년 뉴욕 미술학교를 다녔다. 처음엔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조각·설치미술에 관심을 가졌지만 곧 싫증을 느꼈다.

1910년 레이는 뉴욕의 한 화랑에서 독일계 유대인 사진작가 앨프리드 스티글리츠를 만나면서 그에게서 커다란 감명을 받고 사진에 관심을 갖는다. 스티글리츠는 유럽의 아방가르드 조류를 미국에 최초로 도입한 인물이다. 레이는 뒤샹, 그리고 프랑스 다다·초현실주의 화가 겸 문인인 프랑시스 피카비아와 교류하며 1920년 뉴욕 다다그룹에 합류한다.

레이는 스티글리츠의 권유로 1921년 파리로 간다. 파리 몽파르나스가를 중심으로 모인 가난한 세계 보헤미안 문화·예술인들과 어울린다. 아일랜드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 프랑스 극작가 장 콕토, 프랑스 문인 앙토냉 아르토 등이다. 초현실주의 여성 사진작가 리 밀러와도 만나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1925년 레이는 장 아르프, 막스 에른스트, 앙드레 마송 등과 함께 초현실주의 그룹에 참여한다.

사진작가 레이의 초기 활동은 동료 화가들의 작품 사진을 찍어 카탈로그를 만드는 작업으로 시작됐다. 그러다 동료 작가와 연인 등 주변 인물의 초상을 찍으면서 사진작가로서의 활동을 본격화한다. 많은 걸작을 남겼다. 1924년에 발표한 ‘앵그르의 바이올린’은 그의 대표작이다. 여성의 벗은 뒷모습을 바이올린에 비유했다. 도미니크 앵그르는 외젠 들라크루아와 함께 19세기 낭만주의 화풍을 대표하는 화가로 소묘의 대가였다. 1926년 ‘흑백’도 많이 알려졌다. 30년 ‘리 밀러’, 32년 ‘유리 눈물’, 45년 ‘춤추는 줄리엣’ 등도 그와 사귀고 결혼한 여인들을 작품에 담은 것이다. 멀티 아티스트 레이는 영화도 만들었다. 총 6편의 단편영화를 제작·감독했지만 크게 주목받진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돈 유럽에선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됐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레이는 1940년 미국에 돌아와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한다. 그러나 그는 안전하지만 무료한 미국 생활을 즐기지 못하고 파리를 향한 향수에 젖어 있었다. 그래서 51년 파리로 돌아갔다. 몽파르나스가의 시인·극작가·음악가·화가, 그리고 주변의 여인들과 어울리며 이들을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 레이는 이렇게 말년을 파리 예술가들과 지내다 1976년 폐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반평생을 거닐던 몽파르나스 공동묘지 예술인 구역에 묻혔다.

속박과 통제를 거부한 작가 정신
인생의 전반기는 뉴욕 다다그룹, 후반기는 파리 초현실주의와 조우했던 레이는 활동 초기엔 이름을 날리지 못했다. 그가 대사진작가로 알려진 시기는 1970년대 이후다. 68년 파리 학생혁명의 영향으로 속박을 거부한 다다주의와, 이성에 의한 통제를 벗어난 초현실주의가 프랑스 문화계에서 재조명되자 레이의 성가도 오르게 된 것이다.

레이는 독창성을 지닌 다재다능한 기재였다. 그는 ‘찍는’(Shot) 사진에서 ‘그리는’(Painting) 사진으로 사진의 개념을 바꾸는 시도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렌즈 대신 오브제를 바로 인화지에 올려놓고 빛을 비추어 추상적 이미지를 얻어내는 레이오그래프(Rayographs)와 솔라리제이션(Solarization) 기법을 창안했다. 틀에 박힌 구도와 설정에 의해 찍는 무생물성 사진과 달리 피사체에 신선한 환상, 생동감, 그리고 신비감을 불어넣는 효과를 도출했다. 이 기법은 후세 사진작가들에게도 전승됐다. 기계 문명의 디지털 아트 시대인 오늘날에도 유대인 레이의 독창적 창의력은 계속 경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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