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하는 정체성을 벗어던진 여인의 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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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케스와 더불어 중남미 최고의 작가로 이야기되는 이사벨 아옌데. 혹자들은 그녀를 일러 마술적리얼리즘의 작가라고도 하고, 페미니즘 작가라고도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그녀는 천상 이야기꾼이다.

더욱이 언뜻 사랑을 찾아 길을 떠나는 여성이나, 굴곡 많은 가족사로 위장한 채 그녀가 풀어내는 이야기 속에는 중남미 소수민족의 애환과 이데올로기적 문제, 인종간의 갈등, 역사적 담론 등 오늘을 사는 우리가 떠안은 모든 문제들이 침잠해 있는 것을 보면, 그녀는 역시 거대하며 진지한 담론을 소설적 상상력과 함께 적절히 버무려 재미있는 이야기로 탄생시키는 놀라운 재능을 지녔다.

정치사와 폭력의 무대에 올려진 파란만장한 가족사를 그린 소설 「영혼의 집」이나 불치병을 안고 죽어가는 딸의 가엾은 생을 이야기한 「파울라」를 기억하는 독자들이라면 그녀가 지닌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에 동의함이 분명할 터.

‘누구든지 한 가지씩은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 법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아옌데의 최신작 「운명의 딸」에서 ‘재능’이란 곧 개개인의 운명을 지칭한다. 작가는 왜 엄연히 다른 두 개의 단어 ‘운명’과 ‘재능’을 동일시하는가? 여기에는 남성과 여성, 백인과 인디오, 다수민족과 소수민족, 부유함과 헐벗음, 지배와 피지배라는 이분법을 탈피하고 그러한 문화적 상징을 뛰어 넘기를 소망하는 작가의 의도가 녹아 있다.

운명이란 각자가 가지고 태어나는 재능에 의해 얼마든지 극복되고 개척될 수 있음이 바로 그것. 그리고 이러한 의도는 인디오와 영국인의 혼혈아로 태어나 지배자인 영국인도, 피지배자인 인디오도 아닌 채로 성장하는 ‘엘리사’의 인생편력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배경은 칠레의 항구도시 발파라이소. ‘천국 같은 계곡’이라는 뜻을 지닌 이곳에 이주해온 어느 영국인의 집 앞에 젖먹이 여자 아이가 버려지고, 때마침 아이 하나쯤 기르고 싶어하던 영국 여인의 손에 의해 아이는 엘리사라는 이름을 얻고 때로는 과도한 보살핌을 받으면서 때로는 방임되며 자라난다. 그러던 중 엘리사에게 뜻밖의 사랑이 찾아오지만, 열정과 순결을 동시에 앗아간 그 사랑은 머지 않아 골드러시의 물결을 따라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낳아준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마저 버림받기. 여기까지가 엘리사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이제부터 칠레, 캘리포니아, 중국 등지를 두루 걸치며 광활하게 묘사되는 것은 바로 엘리사가 가진 ‘재능’이다.

그리고 작가 아옌데는 엘리사가 스스로에게 드리워진 운명을 과감히 떨쳐내고 재능을 발휘하며 새로운 삶, 새로운 인생,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서는 과정에 방점을 찍고 있다.

그리고 죽을 고비를 함께 넘겨 준 중국인 한의사 타오 치엔과의 인연, 남장을 한 채 캘리포니아를 종횡무진 누비는 일,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창녀와 금을 캐는 광부들’ 뿐이라는 그곳에서 어리고 병든 창녀들을 탈출시키는 일 등은 운명의 굴레를 벗어던짐으로써 비로소 얻어지는 개개인의 ‘재능’을 강조해주는 대목에 다름 아니다.

운명, 굴레, 타인이 정해준 그들만의 소망. 모든 사람은 이러한 것들을 숙명적으로 지닌 채 태어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그 굴레에서 쉽사리 벗어나기 힘들다. 하물며 창녀 아니면 주부로만 구분되던 19세기 중엽의 여인들은 어떠했을까. 정체불명의 혼혈아로, 영국인 가정의 수양딸로, 골드러시의 땅에서 학대받는 어린 창녀들을 해방시키는 남장 여자로 종횡무진 활약하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다져가는 여인 ‘엘리사’의 삶을 그린 이 소설은 바로 그런 ‘운명 개척’의 주인공이 여자라는 점, 혼혈아라는 점, 소수민족이라는 점에서 더욱 귀하게 읽힌다.

비록 부유하는 정체성을 스스로 올곧게 하기까지 칠레의 항구도시에서 캘리포니아, 그리고 중국대륙까지의 거리만큼의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더라도 지난한 시간은 그녀가 마침내 찾은 자신만의 정체성으로 인해 더욱 빛난다. (이현희/리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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