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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 vs 약사, 2000억 건보 대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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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서울 가양동 대한한의사협회 사무실을 점거한 한의사 40여 명이 29일 협회장실로 통하는 복도를 막은 채 농성하고 있다. 이들은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의결된 치료용 탕약 건보 시범 실시 방안이 한약조제약사들에게 진단권을 인정하는 것이라며 협회장과 임원들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박종근 기자]

28일 오후 서울 강서구 가양동의 대한한의사협회 사무실에 한의사 40여 명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한의사협회장과 임원들의 퇴진을 요구하며 점거농성에 돌입했다. 치료용 탕약에 건강보험을 적용하겠다는 정부 방침을 놓고서다. 이들은 “협회장과 임원진이 정부와의 합의 과정을 비밀로 하며 회원들을 기만했다”고 주장했다.

 앞서 정부는 25일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를 열고 2000억원의 건보 재정을 투입해 치료용 탕약에 건강보험을 적용하기로 했다. 소비자들이 한약에 쉽게 접근하고 약품 선택권을 확대하기 위한 취지였다. 건정심에는 한의사·병원·약사·노동계·재계·전문가 등 관련 단체가 참여했다. 보건복지부는 당시 보험 적용 대상 계층을 노인·여성 등으로, 질병도 근골격계질환·수족냉증 등 한방에 강점이 있는 분야로 한정하되 세부 방안은 추후 정하기로 했다. 내년 10월부터 3년간 시범사업을 한 뒤 지속 여부를 결정한다.

 사실 건보의 한방 비중은 극히 미약하다. 지난해 전체 건보 지출의 3.9%(1조3533억원)밖에 안 된다. 침과 뜸이 대부분이고 약은 연간 280억원(한방 건보 지출의 2%)에 불과하다. 1994년 한방이 잘나갈 때는 28%를 차지했지만 계속 줄고 있다. 정부가 한약 건보를 들고 나온 배경에는 ‘한방 살리기’도 있다.

 그러자 약사회가 먼저 브레이크를 걸고 나섰다. 약사회는 한약 건보 적용에 찬성하면서 한약 관련 면허를 가진 한약조제약사가 있는 약국의 한약에도 보험을 적용해 달라고 요구했다. 한약조제약사는 93년 한약분쟁 봉합 과정에서 한시적으로 허용한 제도다. 5월 말 현재 2만6631명이 있지만 실제 한약을 취급하는 곳은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약사회 박인춘 부회장은 “한약조제약사에게는 명백하게 한약조제권이 있기 때문에 이들도 건보 적용 혜택을 보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한의사협회는 약사회 주장에 반발하고 있다. 한의사협회 한진우 홍보이사는 “한약조제약사들이 탕약을 팔려면 환자 병세를 진단해야 한다”며 “그 경우 약사의 면허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에 안 된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한의사가 “협회 집행부가 약사·한약사의 진단권을 인정했다”고 주장하며 점거농성에 들어간 것이다. 의사단체는 아예 건보 적용 자체를 반대한다. 의사협회 산하 한방대책특별위원회는 “한약이 약으로 인정받으려면 생화학적 성분 분석 및 의약품 조제의 과학화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건정심의 한 회원은 “한의사한테 먼저 적용한 뒤 약국으로 확대하자”고 제안했다. 다른 회원은 “한약조제약사의 진찰행위를 엄격히 단속하는 조건으로 약사에게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복지부는 좋은 취지에서 시작한 정책이 자칫 ‘제2의 한약분쟁’으로 비화될까 우려하고 있다. 복지부 배경택 보험급여과장은 “특정단체의 이익보다 탕약에 보험을 적용하면 환자가 좋아진다는 점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며 “한의사와 약사가 끝까지 합의하지 않으면 건보 적용 자체를 시행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약조제약사=한약분쟁 해결 과정에서 94년 한약사 제도와 함께 도입됐다. 약사면허 소지자나 약대 졸업자가 2년 이내에 시험을 보도록 허용했다. 이후에는 배출되지 않았다. 갈근탕·십전대보탕·쌍화탕 등 100가지 한약을 취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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