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벌한 경쟁에 지친 한국인 감싸줘 요즘 열풍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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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어느 여행사가 새 상품으로 ‘북유럽 가구 디자인 여행’을 내놨다. 덴마크와 핀란드, 스웨덴 등의 가구 갤러리를 돌며 구매도 할 수 있는 일정이라고 한다. 여행 패키지가 따로 나온다니, 지금 한국에서 북유럽 디자인 열풍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올해에는 10만 관람객을 모은 대림미술관의 ‘핀 율 탄생 100주년’ 전시를 비롯해 북유럽 디자인 전시가 줄을 이었다. 최근 몇 년간 카페 인테리어의 변화를 봐도 북유럽 디자인의 인기를 알 수 있다. 심플하면서도 따스한 느낌을 주는 나무 가구와 명랑한 원색의 소품이 대거 등장한 것이다. 그전에는 차가운 느낌을 주는 금속과 합성수지로 된 가구, 절제된 색채가 주류였는데 말이다.

건축도 예외가 아니다. 이달 초에 부산시가 ‘부산 오페라하우스’ 설계 공모전에서 노르웨이 건축회사 스뇌헤타(Snohetta)의 작품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역시 스뇌헤타가 디자인해 2008년 오슬로 항만에 개관한 오페라하우스와 비슷해 문제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지만, 어쨌든 한국에서 북유럽 디자인이 갖게 된 위상을 보여준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여름에 그 오슬로 오페라하우스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마치 해안에 걸쳐진 거대한 빙하 같은 하얀 건축물이었다. 지붕이 완만한 사선으로 지상까지 닿아 있어 누구든 지붕 위를 걸어서 옥상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공연을 보러 오지 않은 사람도 하얀 지붕에 올라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산책할 수 있는 게 매력적이었다. 자칫하면 폐쇄적인 엘리트 문화의 공간이 될 수 있는 오페라하우스를 이렇게 열린 공간으로 만들다니 참 북유럽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더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은 극장 내부였다. 극장 외부는 얼음 같은 하얀 화강암과 대리석인 데 반해, 내부 가운데 대극장을 감싼 벽은 따뜻한 황갈색 목재였다. 대극장 내부도 나무 벽과 오렌지색 좌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사진). 그곳에 앉으니 마치 집에 앉아 있는 것처럼 아늑했다. 진홍색과 금색으로 번쩍이며 위압적인 느낌을 주는 기존의 오페라하우스 내부와 너무도 달랐다. ‘이런 게 바로 북유럽 디자인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내 서점가에도 예술 코너와 생활/인테리어 코너의 화두는 단연 북유럽이다. 스테디셀러가 된 핀란드 디자인 산책을 비롯해 친절한 북유럽처음 만나는 북유럽 인테리어북유럽 생활 속 디자인 등등….

여기에서 서점의 다른 코너로 눈을 돌려본다. 인문/사회 코너, 자기계발 코너의 요즘 화두는 무엇일까? 두말할 것도 없이 ‘힐링(healing)’이다. 책들마다 ‘아픔’ ‘치유’ 등을 제목이나 부제에 넣고 있다. ‘힐링’ 외에 서점가의 인기 키워드는 ‘느림’과 ‘에코(eco)’ 등이다. 인공문명 속에서 극한의 경쟁과 속도에 지쳐 있는 한국인에게 모두 ‘힐링’과 연관된 키워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힐링’과 디자인/인테리어 서가를 점령한 ‘북유럽’ 키워드도 관련이 있을까? 그렇다고 본다. 북유럽 디자인은 힐링이 일상과 밀착된 시각예술로 구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북유럽의 가구와 실내 디자인은 다른 지역보다 길고 혹독한 겨울밤 동안 실내에 갇혀 지내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디자인이다. 그래서 기능적이면서 아름답고 색조가 따스하거나 발랄한 원색이 많은 편이다.

또 힐링 도서들이 치유의 방법으로 공통적으로 외치는 것은 산업화 이후 멀어진 자연과의 관계 회복, 그리고 인간 관계의 회복이다. 자연친화와 인간 상생은 북유럽 디자인의 철학이기도 하다.

지난여름에 오슬로와 함께 릴레함메르를 방문했었는데, 집들이 크지 않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집 안의 방들도 바이킹의 후손인 노르웨이인의 커다란 체구를 생각했을 때 좀 불편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자그마했다. 인테리어는 과시적이지 않고 소박하면서 명랑한 색채로 가득했다. 한마디로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작은 영역만 차지하면서, 목재라는 자연의 선물을 이용해 포근하게 감싸는 것 같은 집들이었다.

또 북유럽은 사회복지와 함께 자연히 공공디자인이 발달했다. 앞서 언급한 오슬로 오페라하우스처럼 결코 위압적이지 않고 누구나 부담 없이 다가오도록 하며 집에 있는 것처럼 아늑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북유럽 공공디자인의 특징이다. 상생의 정신이 담겨 있는 것이다.

지금 한국인은 살벌한 경쟁과 속도에 지치고 아픈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줄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북유럽 디자인의 인기는 치유의 방법으로 자연과의 관계 회복, 인간 관계 회복을 갈구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리라.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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