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 어디든 숨어 있는 ‘유럽 문명의 아버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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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호 25면

키케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00~44)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내가 바라는 방식으로 나를 돌보는 사람은 카이사르가 유일하다.” 카이사르는 키케로에 대해 “로마 제국의 영토를 넓히는 것보다 키케로처럼 로마의 영혼을 크게 확장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서세동점(西勢東漸) 시대를 한참 지나 어쩌면 동세서점으로 나아가는 시대다. 동양이 서양의 유산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는 시점이다. 동양의 입장에서, 혹은 서구인의 입장에서 동양인이 감정이입을 해 살펴본다면 서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딱 두 인물은 누굴까.

새 시대를 연 거목들 <24> 키케로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마도 중동 유대 지방 나사렛에서 태어난 예수와 고대 로마 사람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기원전 106~43)다. 지나치기 쉬운 팩트다. 예수의 경우에는 종교와 관련돼 있어 왠지 껄끄럽기 때문에 그의 역사적 유산을 외면하기 쉽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은 키케로가 2등이라는 것이다.
키케로가 누구길래 유럽 역사의 2등 기여자일까. 그는 고대 로마의 정치가·웅변가·작가·철학자·시인이다. 철학자·시인을 빼고는 대(大)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하다. 대정치인으로서 키케로는 로마의 공화정을 사수하기 위해 분투했다. 그의 사후 로마는 황제의 나라가 됐지만 공화국과 자유를 향한 그의 외침은 근대 유럽에서 부활했다. 대웅변가 키케로의 말 한마디에 정치 판세가 흔들렸다. 키케로는 로마 정치의 중심이었다.

대문호(大文豪)로서 키케로는 라틴어를 깊은 사고를 논할 수 있는 언어로 격상시켰다. 중세를 거쳐 19세기까지 라틴어 문학의 최고봉은 단연 키케로였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키케로는 ‘후진 로마’가 ‘선진 그리스’의 글쓰기를 따라잡는 데 일조했다. 스스로 인정했듯이 철학자로서 키케로는 독창적인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리스의 관점에서는 2류였다. 키케로는 자연법 사상을 포함, 당대 그리스 철학의 모든 문파의 주장을 소화해 로마로 전수하는 데 만족했다. 로마, 서부 유럽에 철학이 사회나 개인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 그 중요성을 각인시킨 것은 바로 키케로다. 시인 키케로도 상대적으로 평범했다. 아쉽게도 그는 시를 가슴보다는 머리로 썼다.

코페르니쿠스, 키케로 읽고 지동설 알아
키케로는 숨은그림찾기 ‘윌리를 찾아라’에 나오는 윌리와 같다. 숨어 있지만 윌리는 그림 어딘가에 있다. 키케로도 마찬가지다. 유럽사의 배경화면 어딘가에 숨어 있다. 아니 우뚝 서 있다. 그리스도교의 고대 교부(敎父) 아우구스티누스(354~430)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원인 중 하나는 키케로의 글이다. 얄궂게도 키케로는 불가지론자였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의 문체는 키케로의 영향을 받았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1737~1794)과 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1743~1826) 등은 키케로 문체의 영향을 받았다.)

키케로는 프랑스 혁명, 미국 혁명의 주역들에게 사상적 원료를 제공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1732~1799)에게 부여한 ‘그의 나라의 아버지(Father of his Country)라는 호칭은 카토가 키케로에게 부여한 ‘Pater Patriae’를 번역한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의 과학 혁명도 그와 관련 깊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주장을 접한 것도 키케로의 저작물에서다.
키케로는 ‘르네상스의 할아버지’다. 페트라르카(1304~74)가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아버지’로 인정받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키케로의 서간문을 1345년에 발견했기 때문이다. (키케로의 서간문이 많이 남아 있는 이유는 그가 해방한 ‘해방 노예’ 티로 덕분이다. 티로는 100세까지 살았다.) 페트라르카의 키케로 서간문 발견을 계기로 편지쓰기 열풍, 고대 문헌 발굴 광풍이 유럽을 휩쓸었다.

일각에서는 키케로를 ‘법학의 아버지’라고도 부른다. 키케로는 법률가로서도 일획을 그었기 때문이다.

단테·셰익스피어·괴테가 각기 이탈리아어·영어·독일어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고 하지만 키케로가 현대 유럽어에 미친 영향은 이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라틴어를 국제어(lingua franca)로 학습하던 서구인들은 키케로의 수사를 언어의 모범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현대 유럽의 ‘국어’들은 키케로를 머릿속으로나 아니면 실제로 번역하는 가운데 싹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번역은 곧 혁명이다. 아랍어로 된 그리스어 문헌을 서구어로 번역하는 것 못지않게, 키케로를 읽고 자국어로 공화와 민주에 대해 토론하는 게 혁명적 결과를 낳았다.

아랍어가 아니라 다른 말로 옮긴 쿠란은 그저 그렇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키케로의 저작도 마찬가지다. 다른 나라 말로 옮기면 말의 맛이 반감된다. 19세기까지도 서양 사람들은 학교에서 키케로가 남긴 주옥같은 말들을 라틴어 원전으로 배우며 자랐다. 다음과 같은 말들이다. (오늘날에도 라틴어 학습의 표본은 키케로의 문체다.) “태어나기 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모른다는 것은 영원히 어린이로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우리만을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분노 속에서는 그 어떤 올바르고 분별력 있는 행동도 할 수 없다.” “감사하는 마음은 가장 위대한 덕목일 뿐만 아니라 모든 덕목의 어버이다.” “숨이 붙어 있는 한 희망이 있다.” “미신을 파괴함으로써 종교를 파괴하지 말라.”

키케로가 세계인의 마음속에서 사라진 이유는 라틴어 학습의 시대가 20세기에 끝났기 때문이다. 20세기가 지나는 가운데 대중 교육은 라틴어보다는 제2 외국어를 가르치게 됐다. 라틴어를 둘러싼 논란은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자를 둘러싼 논란과 비슷했다. 자라나는 세대의 논리 교육을 위해 라틴어 교육이 중요하다, 국어를 잘하려면 라틴어를 가르쳐야 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하지만 라틴어는 논리력 향상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 교육의 기초로도 절실한 수학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글의 힘으로 최고 관직 집정관 자리 올라
세계 문사철(文史哲)의 역사에 엄청난 유산을 남겼지만 키케로의 관심사는 1차적으로 정치였다. 철학이나 역사에 대한 글을 쓴 것은 그가 한가했을 때다. 집정관이라는 로마 정치의 최고 자리에 오르긴 했으나 정치가로서 키케로의 삶은 굴곡이 심했다.

로마의 정치는 오늘날의 정치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정치인들이 보수·진보로 나뉘어 패거리를 짓고 싸웠다. 패싸움에서 키케로는 두각을 나타냈다. 말과 글이 워낙 좋았다. 정적들도 그의 혀와 펜을 찬양했다. 키케로를 끌어들이지 못한 파당은 항상 불안했다.

미국 정치의 상황과 비슷하게 키케로는 변호사로 성공한 다음에 정계로 진출했다. 26세였을 때 존속살인 혐의로 고소된 로스키우스를 성공적으로 변호한 게 결정적이었다. 키케로는 말의 힘으로 유죄가 확실한 재판을 무죄로 만들어 유명해졌다. 키케로의 집안은 부유했으나 명문 정치가 집안은 아니었다. ‘지방 기사(Eques)’로 불리는 가문에서 출생했다. ‘성골·진골’이 아니라 ‘6두품’이었다. 키케로는 ‘어정쩡한’ 출신성분마저도 펜으로 극복했다. 불행히도 키케로의 시대엔 칼이 펜보다 강했다. 군벌(軍閥)이 국가를 협박하는 시대였다. 시대마다 진보, 보수의 성격은 다르지만 기울어져가는 로마 공화국의 진보·보수 사이에서 화합과 타협, 오늘날로 치면 ‘제3의 길’을 표방한 문인(文人) 키케로는 무인(武人)들을 제압하지 못했다.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대세지만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법치주의를 표방했지만 쿠데타를 제압하기 위해 반군에 가담한 로마 시민을 사형으로 다스리기도 했다. 곡학아세(曲學阿世)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으며 근친상간 혐의도 있다. 그의 글쓰기에 대해 자기 과시가 너무 심하다는 평가도 있다. 가정에서는 키케로도 필부였다. 깐깐한 아내, 돈 때문에 고민하고 사랑하는 딸이 죽자 상심으로 나날을 보냈다.

키케로의 삶 속에는 우리나라 역사를 연상시키는 대목도 있다. 키케로는 귀양을 떠나 몸무게가 줄고 엉엉 울기도 하고 귀양에서 풀려 로마로 복귀하기도 했다. 언제 바뀔지 모르는 정파 간 이합집산 속에 ‘줄’을 잘못 서기도 했다. 소신 때문인 경우도 있지만 ‘판단 미스’인 경우도 많았다. 오늘날 우리나라 민주정치의 공간에서 연합이나 합당 같은 것을 제의 받았을 때 거부하고, 거부가 ‘잘못된’ 선택이었을 때는 속상하거나 한가하게 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키케로 시대에 잘못된 선택의 결과는 죽음이었다. 키케로는 잘못된 선택 때문에 공화주의의 순교자가 됐다.

사람은 누구나 어머니 배 속에서 나오지만 죽을 때는 다양한 방법으로 죽는다. 키케로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모두 지어낸 전설일 가능성이 크다. 정적이 보낸 암살자들이 들이닥치자 그는 목을 베는 게 쉽도록 목을 길게 늘여 뺐다. 암살자들은 그의 머리와 손을 잘라내 공중에게 전시했다. 처연하게 상징적이다. 정적 안토니우스(기원전 82~30)의 아내 풀비아는 그의 머리에 침을 뱉더니 머리에서 혀를 뽑아내 머리핀으로 찔렀다. 남편을 괴롭힌 사람에 대한 아내의 분노는 무서웠다.

로마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기원전 63~서기 14)로 불리게 된 옥타비아누스는 어느 날 키케로의 책을 읽고 있는 손자로부터 책을 빼앗았다. 빼앗은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이렇게 말했다. “손자여, 키케로에게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었단다. 그리고 그는 애국자였단다.”

키케로는 자신이 2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불쾌할까. 그 자신의 말에 따른다면 아니다.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최고의 자리를 열망하는 인물이 두 번째, 심지어는 세 번째 자리에서 멈춘다고 해서 그게 불명예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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