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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게 다는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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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의 새 야외 설치 ‘현기증’ 앞에 선 조각가 아니쉬 카푸어. “우리는 주위 사물에 대해 생각하고 반성한 결과 아름답고 시적인 것을 창출하며, 자신을 고양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뒤에 보이는 것은 스테인리스 구(球)를 13m 높이로 쌓아 올린 ‘큰 나무와 눈(Tall Tree and the Eye, 2009)?. [사진 삼성미술관 리움]

구부러진 스테인리스 철판에 한낮의 햇살이 반짝인다. 그 앞에 선 당신, 너비 5m, 높이 2m20㎝의 판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볼 수 있다. 함께 비치는 것은 또한 당신의 주변, 평소엔 무심히 넘겼을 하늘과 나무, 그리고 건물 등이다.

 인도계 영국 조각가 아니쉬 카푸어(58)의 설치 작품 ‘현기증(Vertigo, 2006)’이다. 그 뒤에 비스듬히 놓인 지름 2m80㎝의 둥근 스테인리스 철판은 아예 거울처럼 하늘을 담고 있다. 이름하여 ‘하늘거울(Sky Mirror, 2009)’이다.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이 개관 8주년을 맞아 야외 조각을 바꿨다. 그간 앞마당에서 ‘얼굴’ 역할을 해 온 루이즈 부르주아(1911∼2010)의 대형 거미 조각 ‘마망(Maman)’은 그 소임을 다하고 수장고로 들어갔다.

  리움은 25일부터 세계적 조각가 아니쉬 카푸어의 개인전을 연다. 총 18점이 나왔다. 카푸어가 동아시아 지역 미술관에서 연 첫 대규모 전시다. 작가로서 그의 존재를 알린 초기의 분말안료 작업, 조각 내부의 공간에 주목한 ‘보이드(Void)’ 시리즈, 근작인 붉은 왁스 연작과 대형 스테인리스 설치 등을 망라했다.

 카푸어는 인도 뭄바이 태생이다. 영국에서 미술 교육을 받았다. 동서양의 사상과 문화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예술 개념과 정서를 바탕으로 아름답고 명상적인 작업을 선보여 왔다.

초기작 ‘붉은 색의 은밀한 부분을 반영하기’(1981).

 그는 ‘당신이 보는 것이 바로 보는 것’이라는 서구 미니멀리즘(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예술사조)을 거부한 예술가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라며 관객들로 하여금 조각 저편의 우묵한 심연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예컨대 벽면 전체를 채운 6m 정방형의 ‘노랑(1999)’은 한가운데가 움푹 파였다. 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을 마주한 관객은 거기서 창세 이전을, 자신이 비롯하기 전인 어머니의 자궁 속을, 그리고 죽음을 떠올릴 수도 있다. 벽을 파는 간단한 작업으로 만들어낸 숭고미(sublime)다.

  방한한 카푸어를 23일 만났다. 그는 “보이는 것 이상의 다른 곳으로 흘러가는 국면, 그게 진짜 예술의 시작이다. 작가가 직접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관객과의 상호작용으로 내러티브(이야기)가 창출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작품이 종교적이다.

  “인생이란 신비롭고 혼란스럽다. 인간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우리의 시작과 끝은 어디인가. 그 같은 질문의 답을 구하려 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누구나 종교적이다.”

 -인도 출신의 당신이 세계적 작가로 부상하는 데 이 같은 동양적 요소를 전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는데.

  “일부 서양 예술가들처럼 동양적 요소를 갖다 쓰는 게 아니다. 그것은 비서구인으로서 내가 아는 것이고, 내 철학과 문화의 일부다. 그 외의 다른 변명은 필요 없다.”

  전시는 내년 1월 27일까지. 일반 8000원, 초중고생 5000원. 02-2014-6900.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조각가. 1954년 인도 뭄바이에서 태어나 19세에 영국으로 건너갔다. 혼지예술대학과 첼시미술대학 졸업. 1990년 베니스 비엔날레 영국관 작가로 참여해 프레미오 2000상을 받았고, 이듬해 터너상을 수상했다. 2009년 런던 로열아카데미에서 생존 현대미술가로는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었고, 올해 런던 올림픽 기념 조형물 ‘궤도(Orbit)’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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