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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언론개혁 개입 말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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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개혁인가, 언론 길들이기인가?

언론사 세무조사 전후 권언(權言) .언언(言言) 사이의 갈등이 무한 증폭되고 있는 한국의 최근 언론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연일 신문과 방송을 도배질 하는 주제지만 정작 공감할 만한 판단의 잣대가 부족해 어수선한 현실 속에서 합리적 토론과 성찰을 제공해줄 만한 책이 선보였다.

'언론서의 고전' 으로 꼽히는 『자유롭고 책임있는 언론(A Free and Responsible Press) 』이 문제의 책이다.

1947년 미국에서 발간된 이 책은 국내에서도 언론관련 세미나 등이 열릴 때마다 전문가들이 단골로 인용하는 교과서에 해당된다.

위원장의 이름을 따 '허친스 보고서' 로 불리는 이 책이 반세기가 지나 완역된 것은 분명 만시지탄이다.

하지만 미국 조지타운 대학에서 방문학자로 연구 중인 옮긴이 김택환(한국언론재단 책임연구위원.43) 씨의 지적처럼 번역의 타이밍은 지금이 오히려 적절할 수도 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보고서는 언론의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강조한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언론의 자유보다 책임을 더 강조하고 있다.

'자유에는 사회적 책임이 따른다' 는 말이 해묵은 주제라고 예단하거나 미국과 우리의 현실이 다르다고 외면하는 자세는 성급하다.

언론이 사회적 진공상태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듯 이 보고서가 나오게 된 배경이 있고, 바로 그 배경에 대한 이해가 미국적 특수성을 넘어 우리의 현실에도 대입해 볼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 총격전까지 일어났던 미국의 신문전쟁=허친스 위원회가 출범할 당시는 아직 2차세계대전이 종식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본주의 발전과 더불어 언론의 소유 집중화와 상업화가 활발히 진행되며 선정주의와 판촉을 둘러싼 신문전쟁이 일어난 시기였다.

시카고의 경우 폭력배를 동원한 언론사간 총격전이 벌어질 정도였다.

타임스와 헤럴드 트리뷴을 포함하는 뉴욕 신문들도 판매전쟁을 벌였다. 정부 개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 것도 이런 상황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친스 위원회가 4년간의 연구를 통해 도출해 낸 결론은 '언론의 자율적 개혁' 쪽이었다.

◇ 거대언론과 자율적 개혁=보고서가 쓰여질 당시에 이미 미국 사회는 거대 매스컴 기관들을 요구하고 있었다. 물론 이 매스컴 기관들 역시 권력집중의 한 형태다.

그러나 거대 매스컴을 해체하는 것은 석유 독점이나 담배 독점을 해체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보고서는 지적한다.

"만약 매스컴이 너무 크고 강하기 때문에 해체하는 일에 착수한다면 필요한 서비스도 함께 파괴되고, 매스컴이 정부의 통제를 받게 되면 전체주의를 상대로 한 안전판 자체를 잃게 된다" 는 것이다.

보고서는 또 "언론자유가 실현되려면 정부는 언론의 목소리를 간섭하고, 규제하고, 억압할 수 있는 정부의 능력을 스스로 제한해야 한다" 면서 "언론의 자유를 방어하는 최전선은 정부다… 언론의 목소리를 억압하거나 공중의 판단을 형성시키는 데이타를 조작하는 정부의 권한도 제한해야 한다" 고 강조한다.

◇ 공공이익과 언론의 책임=미국 건국 이념인 수정헌법 제1조를 지지한 미국인들의 목표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막는 것이었다.

자유로운 표현을 막는 유일한 장애는 정부의 검열이었다. 그러나 보고서가 쓰여질 당시 언론 환경은 건국 초기와 달라졌다. 언론은 거대한 사업체가 된 것이다.

보고서는 말한다. "언론의 자유는 언론이 공공의 이익과 통합될 때에만 언론을 발행하는 사람들의 권리로 남아 있을 수 있다. "

이를테면 보고서는 최대의 수용자를 끌기 위해 언론은 의미 있고 중요한 것 보다 예외적이고 선정적인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다.

대다수 매스컴은 나이트클럽 살인사건, 인종폭동, 파업폭력, 관료들 사이의 싸움으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이러한 사건들이 보도되는 것을 반대하지는 않으나 이러한 사건들에 언론이 몰두하는 것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천명한다.

시민들이 정작 필요한 정보와 토론을 제공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언론이 책무를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시민의 권리와 언론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잊혀진 권리를 유지시키는 사회가 되도록 하기 위한 책무가 있다는 것이다.

"언론이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보와 토론을 제공해야 한다. "

허친스 보고서는 결론적으로 ▶정부의 언론 불개입 원칙 ▶언론의 자율적 규제와 질 제고 ▶선정주의 배격과 경영합리화 ▶상호비판과 전문성 제고 등을 권장했다.

◇ 거대 언론, 그리고 광고=허친스 보고서는 세계정세와 산업사회가 복잡하게 발전함에 따라 시민들의 정확하고 다양한 정보에 대한 욕구가 증대되었고 이것은 역설적으로 거대한 언론의 존재를 요청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언론은 그 어떠한 외부적 압력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함이 다시 강조되는 것이다.

보고서는 "재정적.포퓰리즘적.정파적.제도적 압력을 공개하고 견제해야 한다" 면서 언론이 전적으로 자유로워지려면 "언론은 자신의 경제적 위상과 경제적 집중, 그리고 피라미드식 조직구조 등에서 발생하는 편견들을 극복해야 한다" 고 말한다.

되풀이되는 비판들 중 하나가 언론이 광고주에게서 압력을 받는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이러한 증거가 뚜렷하지는 않고 광고주의 견해를 따르는 것은 허약한 신문들에서 나타나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 "신문이 재정적으로 안정되고 더욱 독립적이라면 이러한 광고주의 압력을 저지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지적한다.

◇ 명예훼손과 반론권=명예훼손에 대한 구제방법의 한 대안으로 보고서는 언론사로부터 피해를 본 당사자가 관련 내용의 철회 또는 반론의 기회를 확보할 수 있는 입법을 권고한다.

이러한 법적 구제가 늘어나 언론 책임자들이 자발적으로 오보를 정정하도록 이끌어 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언론의 거짓말을 줄일 수 있다. "

그런 점에서 언론의 자유는 조건부 권리, 즉 기자.방송인 혹은 발행인의 정직성과 책임이라는 조건하에 주어진 권리다.

"의도적이든 부주의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수정헌법 제1조의 보호를 주장할 자격이 없다. "

◇ 법적 제재가 필요한가=정부는 언론기관들이 배포 및 판로를 독점하려는 시도를 막을 수 있다. 그러나 보고서가 말하는 정부 조치는 극렬한 판촉경쟁을 막기 위한 시 조례나 경찰의 보호 등의 범위를 말한다.

보고서는 커뮤니케이션 산업에서 활발한 경쟁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거대 언론사를 강제로 깨기 위해 반독점법을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이라고 진단한다.

나아가 매스컴을 정부가 소유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언론은 자신과 다른 사상이나 태도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어야 한다. "

◇ 언론 종사자의 전문성〓보고서는 "많은 유능한 기자와 논설위원들이 좌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당혹스러웠다" 고 밝힌다.

좌절감이란 그들에게 전문직업적인 이상이 요구하는 일을 하도록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론은 그 구성원들의 능력과 독립성.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기를 권고한다.

적절한 보상과 계약과 교육은 진정한 전문직업인으로서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보고서는 이외에 영화.출판 등 커뮤니케이션의 다양한 양상과 자유의 조건도 언급하고 있다. 이 보고서에 대해 구체성과 현장성이 결여됐다는 혹평도 있다.

그러나 혼란스런 우리 언론의 현실에서 이만한 참고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다는 판단이다.

*** 허친스 보고서는…


『자유롭고 책임있는 언론』은 '허친스 보고서' 란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언론자유위원회' 의 위원장 로버트 허친스 시카고대학 총장의 이름을 따서 부른 것이다.

허친스 위원장 외에 윌리엄 호킹 하버드대 명예 철학교수, 라인홀드 니버 유니언신학대 종교윤리학 교수, 해럴드 라스웰 예일대 법학교수 등 당시 저명한 학자 12명이 참여했다.

보고서에서 말하는 '언론(Press) ' 이란 신문.방송은 물론 잡지.책.영화까지 망라해 공중에게 뉴스와 의견, 그리고 감정과 신념을 전달하는 모든 수단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 연구는 타임사로부터 20만달러(현재 가치로 26억원) , 엔사이클로피디어 브리태니카(영국대백과사전) 사로부터 1만5천달러의 재정지원을 받았다.

이 보고서는 미국에서 '언론의 사회책임이론' 이 태동하는 데 모태가 됐고, 영국의 왕립언론위원회 등의 출범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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