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없는 30대女, 월50만원씩 입금하니 '깜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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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주부 권모(37)씨는 다니는 직장도 없는데 증권사에 만들어 놓은 월급통장이 하나 있다. 증권사에 매달 한 번씩 ‘급여’라는 문구를 넣어서 50만원씩 이체해 권씨가 월급을 받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는 것이다. 권씨는 “월급통장으로 인정받으면 각종 수수료가 면제되는 데다 3%대의 이자까지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체리피커’ 사이에서는 이처럼 자신에게 가짜 월급을 보내는 것을 ‘급여 자작(自作)’이라고 부른다.

 ‘꼼수’와 ‘재테크’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고단수’ 체리피커 때문에 금융회사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 실적 없이 혜택만 챙기는 수법은 갈수록 교묘해지고, 그 수도 급증하고 있다. 일부 금융회사에선 이들을 ‘악성’ ‘블랙’이라며 하소연할 정도다.

 21일 금융업계에 따르면 요즘 체리피커의 대표적인 수법 중 하나는 ‘순규’ 혜택을 활용하는 것이다. 순규란 한 번도 특정 신용카드·은행·증권사와 거래하지 않은 ‘순수 신규고객’을 뜻하는 체리피커의 은어. 금융회사는 고객을 늘리기 위해 신규 가입 고객에게 각종 포인트·쿠폰은 물론 수수료 면제 등의 서비스를 6개월 정도 제공한다. 체리피커는 6개월 정도만 해당 금융회사를 이용하고 서비스 기간이 지나면 금융회사를 바꾸는 식으로 ‘순규’ 혜택만 쏙 빼먹는 것이다.

 급여 자작도 있다. 조건이 조금씩 다르지만 주요 은행·증권사는 매달 ‘급여’라는 문구와 함께 50만~70만원 이상의 돈이 입금되면 이를 월급으로 간주해 급여통장으로 인정해 준다. 번거롭지만 급여 자작을 하는 이유는 급여통장의 혜택이 그만큼 쏠쏠하기 때문이다. 금융회사에서는 직장인 고객을 늘리기 위해 급여 이체 실적이 있으면 각종 송금 수수료 등을 면제해 주고 있다. 또 연 0.1%에 불과한 다른 보통예금과 달리 이자도 정기예금 금리에 육박할 정도로 높은 편이다. 이미 고전이 된 수법으로 ‘굴비 엮기’도 있다. 신용카드 1장의 연회비만 내고 여러 장의 카드 할인 혜택을 굴비 엮듯이 누릴 수 있어 이런 말이 나왔다.

 금융회사 입장에선 이런 ‘깍쟁이’ 소비자가 ‘골칫덩이’다. 연회비보다 할인 금액이 더 커지고, 업무가 늘면서도 이익은 제자리걸음이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고객 수가 늘어날지 모르지만, 수익성에는 오히려 ‘마이너스’라는 것이다.

이에 체리피커를 막으려는 금융회사의 ‘방패’도 견고해지자 양측 간의 두뇌싸움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은행·증권사는 급여 자작을 하는 유령 회사원을 솎아내기 위해 전산 시스템상 급여 코드로 입금되는 금액만 월급으로 인정하는 시스템을 갖추기 시작했다. 한 은행 관계자는 “의심 계좌에 대해서는 회사에 직접 전화를 걸어보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카드사는 최대 할인 한도를 제한하거나, 사용 금액대별로 연회비를 2~3배 올리는 식으로 사용요건을 까다롭게 하고 있다. 제한이 없던 마일리지 적립도 한도를 정했고, 적립실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항목도 대거 늘렸다.

관련 서비스를 전면 중단하는 ‘강수’를 꺼내기도 한다. 한 카드사가 체리피커에 의해 수난을 겪었던 ‘짤짤이’ ‘나누미’ 등의 수법이 그 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전체 고객에게 돌아가야 할 혜택이 철새형 신규 가입자에게만 몰리는 마케팅에 대한 반성이 적지 않았다”며 “요즘은 기존 고객의 만족도를 강화하고 충성도 높은 고객을 늘리는 식으로 마케팅 방향이 바뀌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서비스를 중단·축소하는 것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조남희 금융소비자원 대표는 “고객을 유치할 때는 혜택을 선전해 놓고, 막상 서비스를 줄일 때면 이를 제대로 알리지도 않고 있다”며 “과열경쟁으로 스스로 수익성을 악화시킨 업체가 그 피해를 소비자에게 떠넘기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체리피커(Cherry Picker)

접시에 담긴 신포도와 체리 가운데 달콤한 체리만 쏙쏙 집어먹거나(pick) 체리가 올려져 있는 케이크 위에서 비싼 체리만 골라먹는 사람을 빗댄 마케팅 용어다. 기업의 상품·서비스 구매 실적은 낮으면서 기업이 제공하는 각종 부가 혜택·서비스를 최대한 활용하는 소비자를 뜻한다. 기업에는 수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고객이지만 소비자 입장에선 실속을 챙길 수 있어 ‘벤치마킹’ 대상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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