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고도에서 오늘의 정치를 묻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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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가을이 무르익고 있다. 신라 선덕여왕릉에서 진평왕릉으로 향하는 길, 보문들판이 황금 물결로 일렁인다. 길이 끝나는 곳, 아름드리 나무 사이에 진평왕이 누워있다.

경주를 여행하는 방법은 허다하다. 졸린 눈을 비비며 올랐던 이른 새벽의 석굴암은 이제는 아스라한 수학여행의 추억으로 남아 있을 테고, 벚꽃 흩날리던 봄날 그이와 보문호수를 거닐었다면 당신에게 경주는 어느 푸른 봄날로 새겨져 있다. 당신이 남산에 올라 길목마다 불쑥 나타나는 부처님께 꼬박꼬박 배를 올렸으면, 제법 경주를 안다고 으스대도 괜찮다. 황룡사지는 어떠한가. 이제는 사라져버린 저 먼 옛날의 것이 그리우면 황룡사지에 가서 지는 해를 바라보시라 권한다.

이런 방법도 있다. 지난 8월 23일부터 9월 21일까지 하나은행 임직원 850여 명이 경주로 1박2일 연수를 갔다 왔다. 기업 연수면 보통 경치 좋은 리조트 빌려 놓고 온종일 세미나나 하는 게 고작인데, 경주로 내려온 하나은행 직원들은 1박2일 동안 시간 쪼개가며 부지런히 경주를 뒤지고 다녔다. 그들이 경주에서 찾아낸 건, 뜻밖에도 리더십이었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사)신라문화원 진병길 원장의 설명이다.

“경주는 세계적인 도시였습니다. 세계적인 도시 경주에는 글로벌 리더가 있었습니다. 선덕여왕, 원효대사, 김유신 장군 등 신라의 위인은 우리나라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리더였습니다. 그들의 인생과 철학을 직접 배울 수 있는 경주야말로 기업 연수에 가장 적합한 도시입니다.”

족히 십 수 번은 경주를 들락거렸지만, 리더십 여행이란 테마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경주의 수많은 유적은, 결국 한 시대를 이끌었던 위인의 흔적이었다. 문득 두 달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가 떠올랐다. 유력 대선 주자 3인의 리더십도 경주에서 찾을 수 있을까? 물론 있었다. 경주에는 왕의 딸도 있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명문가도 있고, 군사력을 장악한 왕의 친구도 있었다. 조건과 배경이 후보들과 맞아떨어지는 부분도, 후보 간 특성이 뒤섞이는 부분도 있었지만, 위인마다의 미덕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경주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세 개나 거느린 세계적인 역사도시다. 199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불국사·석굴암과 2000년 지정된 경주 역사유적지구(남산·월성·대릉원·황룡사지·산성지구)가 1500년 전 신라 불교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이라면, 2010년 지정된 양동마을은 조선 후기 유교 공동체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전 세계 어디에도 천 년의 시차를 두고 전혀 다른 정치·종교적 배경을 지닌 세계문화유산을 동시에 거느린 도시는 경주 말고는 없다. 그만큼 경주는 가볼 데가 많고, 여행하는 방법도 많다.

깊어가는 가을, 정치의 계절도 무르익는다. 계절에 맞는 새로운 시각의 경주 여행을 제안한다. 다른 눈을 갖다댈 때마다 경주는 더 깊어지고 커진다.

글=손민호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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