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당신의 ‘홈’은 안녕한가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40면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한동안 식상하다며 멀리했던 일본 드라마를 다시 챙겨보기로 한 건 이분 때문이다. ‘원더풀 라이프’(1999), ‘아무도 모른다’(2004), ‘걸어도 걸어도’(2008) 등 만드는 작품마다 각종 영화제에 초청되며 찬사를 받아온 고레에다 히로카즈(50) 감독. 개인적으로 일본 영화감독 중 최고로 꼽는 그가 처음으로 10부작 연속 드라마를 연출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난 9일부터 일본 후지TV에서 방송을 시작한 화요 드라마 ‘고잉 마이 홈(Going My Home)’이다.

 광고 프로듀서인 남편과 푸드 스타일리스트 아내가 꾸려가는 한 가정의 일상을 그린 이 드라마는 한편으로 그다워서 반갑고, 다른 한편으론 그답지 않아 신선하다. 주인공 료타(아베 히로시)는 한때 의욕 넘치는 프로듀서였지만 이제는 광고주를 위해 콘티를 36번 고치는 40대의 소심한 가장이 됐다. 어느 날 고향의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오랜만에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다. 한데 허둥지둥 달려온 가족들, “생명엔 지장이 없다”는 소식에 “병세가 어중간하면 가족들이 고생”이라 불평하고 아버지를 돌볼 당번을 정하자며 가위바위보를 한다. 태연한 말투로 서로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가족간의 대화가 압권이었던 ‘걸어도 걸어도’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연출한 후지TV 드라마 ‘고잉 마이 홈’.

 너무 익숙해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소소한 순간들을 포착하는 감독의 장기는 그대로다. 하지만 드라마는 ‘고레에다표 영화’들보다 훨씬 유머러스하고 생동감 있게 흘러간다. 그간 단단하게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감독이 드라마라는 대중적인 매체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친절히 말을 거는 느낌이랄까.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아버지에게 묘령의 여인이 찾아오고, 가족들은 그녀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아버지의 행적을 뒤쫓는다. 각본까지 직접 쓴 고레에다 감독은 “엉망으로 보이는 이 가족을 통해 우리에게 ‘홈’이 갖는 의미를 묻고 싶다”고 했다.

 일본에서는 유명 영화감독이 TV 드라마의 연출을 맡는 일이 드물지 않다. ‘회로’(2000) 등을 만든 공포영화의 거장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올해 초 연출한 드라마 ‘속죄’는 특유의 서늘함이 살아 있는 수작이었다. 만화 원작의 드라마 ‘심야식당’은 영화 ‘오다기리 조의 도쿄타워’(2007)를 만든 마쓰오카 조지 감독이 연출했다. 한국에서도 언젠가 국제영화제를 주름잡는 유명 감독들이 만든 TV 드라마를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허진호 감독이 풀어내는 16부짜리 멜로 드라마라든지,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본격 심리스릴러 드라마 등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설레는 기획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