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제재로 화폐 못 찍어 돈줄 타들어가는 이란 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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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이란이 ‘화폐와의 전쟁’을 겪고 있다. 국제금융거래 제한과 석유수출 감소로 외화는 고갈되고 리알화 가치는 폭락하는 데다 발권마저 어려운 상황이 됐다. 리알화 발행에 관여해 온 서방기업들이 이란 경제제재에 맞춰 계약 연장에 응하지 않고 있는 까닭이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독일의 인쇄기 제조업체인 쾨니히&바우어, 룩셈부르크의 플린트 그룹, 영국의 대형 지폐인쇄 기업인 들라루 관계자들은 이란에서 사업을 중단했다.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단체인 ‘핵무장이란반대연합(UANI)’은 리알화의 지폐 인쇄, 지폐용 종이 공급, 위폐방지용 기술 제공을 하는 서방회사들에 대한 압박 강도를 높이고 있다. 화폐가치 폭락에 따른 구매력 약화를 보완하려고 이란 중앙은행이 리알화 공급을 확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UANI의 마크 월러스 대표는 “이란 최고지도부가 유동성 조작을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결정과 경제 정책의 실패, 국제적 고립 등에서 비롯된 재앙적 충격을 자국민에게 숨기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리알화 가치는 이달 들어 40%가량 급락했다. 테헤란 외환시장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이란 당국은 리알화 폭락을 막기 위해 연초에 달러와의 환율을 1대 1만2260으로 고정했지만 시중환율은 고공 행진했다. 9월 말 환율은 1대 2만2000, 10월 중에는 최저 3만7500까지 폭등했다. 중앙은행이 고시한 1대 2만8500에 거래하는 곳은 거의 없다. 테헤란에서는 이달 초 리알화 가치 폭락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과 유럽연합(EU)의 강도 높은 제재가 올 초 시작되면서 이란 국민은 환율·물가·실업률 급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이란 중앙은행에 대한 금융거래 제한으로 이란은 외화를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석유판로가 대거 막히면서 오일머니 수입도 크게 줄었다. 지난해 12월 하루 220만 배럴에 달했던 석유수출은 지난 9월엔 86만 배럴로 급감했다. 수입품을 중심으로 한 생필품 가격은 크게 올랐다. 8월 공식 인플레율은 27%나 됐다. 실제로는 이보다 2배나 높을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도 있다.

 산업생산도 크게 감소했다. 자동차생산은 6개월 사이 42%나 줄어 대량해고와 협력업체들의 공장폐쇄로 이어졌다. 2011~2013년 실업률은 25%나 늘어날 전망이다. 이란의 올해 국내총생산(GDP)은 0.9% 감소할 것이라고 국제통화기금(IMF)은 예측했다. EU가 최근 금융·무역·에너지·수송 부문에서 추가 제재를 결정함에 따라 이란의 경제상황은 더욱 악화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서방회사들의 철수로 화폐 공급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이란의 경제위기는 더욱 복잡하게 꼬일 수밖에 없다.

 그동안 경제위기를 부인해 왔던 이란 지도부는 최근 서방의 제재에 대해 ‘경제전쟁’이라고 비난하면서 어려움을 간접적으로 인정했다.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는 국영TV 연설에서 “이런 제재는 야만적이다. 이란에 대한 전쟁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패배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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