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위험한 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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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대체 몇 번째인가, 그런데도 또 보고 말았다. 지난주 개봉한 영화 ‘위험한 관계’ 얘기다. 존 말코비치, 미셸 파이퍼 등이 출연한 1988년작 동명의 미국 영화부터, 현대 뉴욕의 하이틴 로맨스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 조선 시대로 옷을 갈아입은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까지 같은 이야기를 알뜰하게 챙겨본 셈이다. 숱하게 변주된 이 영화가 한·중 합작판으로 또 세상에 나왔다. 1930년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사교계의 방탕한 남녀가 정숙한 이들의 사랑을 담보로 게임을 벌이다가 함께 파멸한다는 이야기다. 영화에는 열강의 조계지로 갑자기 국제도시가 됐던 당시 상하이의 화려하고도 불안한 모습이 볼거리로 등장한다. 이전 작품들보다 권선징악의 교훈이 더 강조된 것은 원작에 충실했던 건지, 현지화(?)에 성공한 건지.

장오노레 프라고나르, 그네, 1767, 캔버스에 유화, 81×64㎝, 월레스 컬렉션, 런던.

 게다가 또 사들이고 말았다. 피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1741~1803)의 서간체 소설 『위험한 관계』. 대학 때 수업 교재로 구입했던 이 프랑스 소설은 꽤 오랫동안 내 책꽂이에 머물러 있었다. ‘밀고 당기기’의 연애 교과서이자, 인간 욕망의 저 밑바닥을 환멸이 느껴질 만큼 철저히 헤집은 통속 소설이다. 등장인물들 간에 오간 175통의 편지로만 이 모든 이야기를 전달하는 저자의 능청이 압권이다. 군인 라클로는 지방 임지에서 소일거리로 여러 편의 소설과 수필을 썼다. 포병 출신답게 양측의 공격과 반격이 오가는 묘미가 있는 이 소설로 마흔한 살에 문명을 떨쳤다. 출간 사흘 만에 초판 2000부가 동이 났을 정도다. 저자의 목소리는 편지에 붙인 8개의 주석에만 나오는데 마지막 주석은 한껏 점잔을 빼면서도 이 막장 드라마의 ‘시즌2’라도 예고하는 듯하다. “언젠가는 이 책의 후속 이야기를 발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약속할 수는 없다… 독자들이 뒷얘기를 읽고 싶어 하는 이유는 우리와 같지 않을 테니 말이다.”

 소설과 함께 떠오르는 그림은 장오노레 프라고나르(1732~1806)의 ‘그네’(1767). 그네 타는 ‘샬랄라’ 아가씨와 그 밑에서 살랑이는 치맛속을 들여다보는 남자라니, 미술사 교과서에 실리기엔 너무 경박하지 않나 싶은 그림이다. 프랑스 루이 15세 때의 귀족 취향인 로코코 미술의 완성을 보여주는 작품. 절묘한 것은 “사랑·가족애와 같은 사사로운 감정이 사상 처음으로 미술의 주제가 됐다”(잰슨, 『서양미술사』)는 로코코에 대한 분석이다. ‘위험한 관계’ 역시 개인의 감정을 들여다보기 시작한 시대의 부산물이다. 2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계속 재생되는 매력적 콘텐트가 된 비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