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만 끌 수 있다면 '화성인' 된들 대수랴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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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채널 tvN의 ‘화성인 바이러스’와 ‘화성인 X파일’은 연예인이 아닌 별난 사람을 소개하는 오락프로그램인데, 인기만큼 잡음도 끊이지 않는다. 며칠 전에는 여기 등장한 ‘선물집착녀’가 인터넷 포털 검색어 상위를 차지했다. 2년 동안 120명의 남자를 만나 1억원어치 선물을 받았다고 한다.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그녀에 대한 비난이 쇄도했다. 그러자 그녀는 제작진의 연출과 편집에 의해 훨씬 과장됐다고 해명했다. 제작진은 조작이 전혀 없었다고 반박했다.

지난달에 등장해서 무조건적인 강남 찬양과 강북 혐오를 보여 많은 악플로 응답 받은 ‘강남빠녀(강남에 빠진 여자)’의 경우에도 비슷한 출연자의 해명과 제작진의 반박이 있었다. 이런 전개는 사실 데자뷰가 느껴질 정도로 ‘화성인’을 둘러싸고 최근 몇 년간 반복되는 사이클이다. 그 끝은 언제나 흐지부지. 그래서 이 해명과 반박 과정조차도 프로그램의 여파를 확대 재생산하려는 전략 아니냐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나올 정도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방송이 물의를 빚을 것을 각오하고-아니 기대하며-자극적인 소재를 찾는 것은 시청률에 목을 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욕먹을 게 뻔한 소재로 방송에 출연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대체 무엇일까? 그에 대한 한 가지 답을, 폴란드 출신의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최근 에세이집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찾을 수 있다. 거기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나는 보여진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바우만은 이것이 매스미디어와 SNS로 뒤덮인 시대에 르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대체할 것이라고 씁쓸하게 말한다. 이 시대에는 타인에게 보여지는 것으로 자신이 존재하는 근거와 가치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바우만에 따르면 바로 이런 식의 삶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 연예인을 포함한 유명인들이다. 대중은 유명인의 업적과 행위의 무게를 따져서 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저 그들이 매스미디어를 통해 많이, 자주 보여지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그들처럼 되기를 갈망한다.

즉 ‘보여짐’의 질보다도 양을 중시한다는 얘기다. ‘명예’가 아닌 ‘유명세’를 추구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우만은 쉴 새 없이 트위팅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바로 이 ‘보여짐’의 욕망이라고 말했다. 욕먹을 것을 알면서 ‘화성인’에 출연하는 사람들의 심리도 같은 것이 아닐까.

매스커뮤니케이션 시대의 병적인 유명세 욕망에 대해서 바우만 같은 학자들도 날카롭게 분석했지만, 가장 간단명료한 말과 행동으로 직접 그것을 보여준 사람은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1928~87)이었다. 워홀은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뭐라고 쓰든지 신경 쓰지 마라. 단지 얼마나 많이 쓰는지 신경 써라”는 말을 남겼다.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의 선구적 발언이다. 요즘은 정치인과 연예인처럼 대중의 관심을 먹고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일반인까지 SNS에 자극적인 말이나 사진, 동영상을 올리고 ‘화성인’ 등에 출연해서 타인의 시선을 끌려고 애쓴다. 무플보다 악플이 낫다고 생각하며.

워홀의 더욱 유명한 말은 이것이다. “미래에는 누구나 15분 동안은 유명해질 것이다(In the future, everyone will be world-famous for 15 minutes).” 그는 TV시대인 1968년에 이 말을 했는데, 인터넷과 SNS시대인 2000년대 들어서 이 말은 완벽하게 실현됐다. 인터넷 포털 검색어에 오르내려 유명해지고 싶다면, ‘화성인’ 출연 신청을 하는 것보다 더 빠른 방법으로 대중교통을 타고 엽기적인 짓을 하면 된다. 그러면 ‘버스 ××남’ ‘지하철 ××녀’로 실시간 검색어에 몇 분간이라도 올라갈 수 있다. 물론 이 경우 유명세와 반비례하며 명예는 추락하겠지만.

워홀의 팝아트의 가치에 대해서는 지금도 평이 엇갈린다. 그는 대중매체 속 메릴린 먼로 같은 유명인 이미지(사진)를 실크스크린으로 대량 복제 생산하면서, 자신의 스튜디오를 아예 공장(The Factory)이라고 불렀다. 그는 전략적으로 유명인과 친교를 갖고 그들을 작품에 등장시키고 또 센세이셔널한 언행을 해 미디어에 되도록 많이 노출되도록 했다. 어찌 됐건 그의 대중문화 예언가로서의 가치는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화성인’과 ‘SNS’ 집착으로 “15분의 유명세”에 병적으로 매달리는 21세기가 증명하듯이.

문소영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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