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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있는 토크쇼] '우리말 철학사전1'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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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부터 기획대담 시리즈 '책이 있는 토크쇼' 를 마련한다.

학술서와 대중서를 망라해 이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화제의 책을 놓고 저자나 그 방면의 전문가와 함께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는 이 코너를 통해 책읽기의 또 다른 재미를 맛보길 기대한다. 첫번째로최근 출간된 『우리말 철학사전1』을 골랐다.

12명의 공동저자 가운데 독일에서 서양 근.현대 철학을 공부한 이기상 외국어대 교수와 김상봉 전 그리스도신학대 교수가 대담자로 나섰다.

사회〓책 제목이 눈길을 끈다. "언제는 우리말로 철학을 하지 않았단 말인가?" 하는 문제제기로 대담을 시작해보자.

이기상 교수〓서구 이론을 수입 소개하는 '철학 오퍼상 수준' 을 벗어나 우리의 삶 속에서 우러나온 주체적 철학을 하자는 뜻으로 받아들여 달라. 스스로 철학함이 없이 외국에서 유행한 이론을 앵무새처럼 되뇌었던 지난 한 세기를 반성하자는 것이다. 서양철학이 상륙한 지 1백년이 지났다. 이 땅에서 우리말로 철학하기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김상봉 교수〓우리말로 철학한다는 것이 한자나 외국어를 배제하고 국어순화운동을 펴자는 것은 아니다. 나는 동시대인의 삶을 포괄하며 참된 의미의 우리를 찾아 정체성을 확립하자는 뜻으로 이해하고 참여했다.

사회〓영어공용어 주장까지 나오는 세계화시대에 철학의 한국화를 주장하는 것은 너무 국수주의적 아닌가.

이〓하지만 잘 보라. 철학의 독일화 혹은 영국화란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그 나라 철학자들의 글 속에 그들의 일상적 생활세계가 이미 녹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을 반영한 철학을 하지 못했다. 삶의 현장에서 부대낀 아픔이 반영된 우리의 시대정신을 정립해내지 못한 것이다.

사회〓좋다. 이해된다. 이쯤해서 그것과 사전 만드는 일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를 되물어보고 싶다.

이〓창조적으로 철학을 하기 위해선 믿고 인용할 만한 철학사전과 철학사책이 필수다. 그것은 비유컨대, 숟가락과 젓가락을 갖추는 작업이다. 자기만의 독특한 철학 줄기를 이루고 있는 독일어권.프랑스어권.영미어권 등을 보면 그들이 제일 먼저 최대한의 노력을 들여 실행한 사업은 자신들의 언어로 된 철학사전을 편찬해 낸 일이다. 우리말 철학사전은 주체적 사고를 위한 여건을 만드는 의미있는 첫걸음으로 자부한다.

김〓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했듯이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말의 개성이 철학의 개성이다. 서양 중세엔 담론의 중심이 라틴어였기 때문에 유럽 각 국의 개성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근대 이후 자국어를 쓰면서 개성이 드러났다. 그 개성을 만들어 간 과정을 이론화한 것이 그들의 철학이다. 이제는 우리 철학자들도 서양철학의 개념을 몰라서 열등감을 느끼는 경우는 드물다. 이제는 우리의 일상어로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이〓철학을 하려면 사전도 번역서도 없는 우리 형편에선 시쳇말로 '맨땅에 헤딩' 식으로 시작해야 했다. 원전을 참고하기 위해 라틴어.영어.독일어.프랑스어에 한문과 일본어까지 한 사람이 다 해야 한다. 외국어가 철학에 필수이기도 하지만 철학이 외국어습득은 아니지 않은가. 이제 사전과 번역이 있다면 많은 시간을 창조적 사유에 쏟아부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두분의 이야기는 우리의 근대화 과정 전반에 대한 반성과도 맞물려 있다.

김〓그렇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는 말로 철학의 근본방향을 제시했다. 우리는 자기를 잃어버린 백성이다. 진리를 자기 내면에서 찾지 않고 밖에서 찾는다. 중국.일본.미국 등 우리에게 압도적으로 다가온 외세를 흉내내기에 급급했다. 세대간 종교차이가 우리처럼 심한 나라도 드물다. 불교를 믿는 시어머니와 기독교를 믿는 며느리의 갈등과 같은 분열상이 사회 곳곳에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다.

사회〓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은 전통에 대한 고찰도 있어야 하는데 이 책은 서양철학 일색으로 돼 있다. 책제목을 '서양철학사전' 이라 해야 옳지 않을까.

이〓앞으로 5권까지 나올 예정이니까 계속 지켜봐 달라. 서양철학의 근본개념을 우리말로 고민하며 소화해 풀어내는 일은 당연히 우리의 전통적 사유와 비교를 포함한다. 그 과정에 우리 전통적 사유의 훌륭한 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우리는 현재 모든 면에서 서양의 논리대로 살고 있다. 서양이 다 좋다 혹은 다 틀렸다고 말하는 것은 철학하는 자세가 아니다. 서양철학에서 나의 내면을 거울에 비추어보듯 반성하는 전통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그들의 한계는 나 이외의 남을 사물화하고 대상화했다는 점이다.

이기상〓우리 것을 말하면 흔히 퇴계와 율곡 등을 거론하는데 중요하게 지적해야 할 문제는 그들의 언어가 오늘 우리의 일상어로 번역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양철학계도 형이상학이란 말을 늘 쓰면서도 그 원조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도 아직 번역하지 않았다. 우리말로 철학하기란 현 단계에서 결국 번역의 문제와 직결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시대 철학자들은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

김상봉〓서양철학자들이 보여준 반성적 사유의 방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우리가 서양의 거울에 비친 초상화까지 우리 모습이라고 할 것은 없다. 우리는 그들에게 없는 고유의 문화가 있다. 둘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고 간격을 메우는 일이 우리 시대의 과제다.

사회〓이 책에서 구체적 예를 든다면.

김〓이기상 교수가 서양철학의 핵심개념인 'Being' 과 그것을 번역한 '존재' 와 '있음' 이란 말을 비교한 것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이 말들은 같은 것 같지만 사실 역사적 배경이 다르기에 그 울림도 다르다. '존재' 라는 번역어도 우리에겐 추상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있음' 은 생명력이 있는 말이다.

이〓서양철학사는 존재라는 개념을 둘러싼 거인들의 싸움의 연속이었다. 우리는 서양과 다른 길을 걸어오다 20세기 근대화과정에 서양의 존재의 눈에 압도당했다. 존재의 눈이란 생물학적 눈이 아니다. 한국인의 존재에 대한 이해는 '있음' 만을 중시한 서양과 달리 '있음' 과 '없음' 의 상관관계를 중시하는 특징을 보인다. 우리의 있음은 없음과 없음을 '잇는' 있음이다. 우리 고전어휘에서 '있음' 은 '잇음' 이었다.

김〓있음과 없음을 삶과 죽음의 문제로 바꿔보면 이해가 쉬울 수 있다. 태어나기 전과 죽음 이후를 없음이라 한다면 우리는 이땅에서 잠시 몸을 빌려 살고 있는 것이다. 삶의 유한성을 생각하기에 우리의 삶은 진지해지고 그만큼 가치를 추구하게 된다. 없음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이 요청된다.

이〓서양의 경우도 소크라테스 이전엔 있음의 지평이 넓었다. 신화까지 포함했다. 그러나 신화적 서사인 뮈토스에서 계산적 이성인 로고스로 넘어가면서 로고스 이외엔 없음으로 규정하고 무시했다. 서양의 역사는 무(無) 를 제거해온 역사다. 그래서 최근 환경오염이나 생태계 파괴를 무가 일으키는 반란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성중심.인간중심.존재중심, 다시 말해 서양중심의 사고에 대한 반성이 요청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없음에 주목한 우리의 삶의 문법에서 하나의 대안을 찾을 수 있다.

사회〓사전이라면 적어도 고등학생 이상은 볼 수 있을 정도로 좀더 쉽게 써야 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이〓주체적으로 사고하고 쉽게 써 본 경험이 적기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철학함이 배어 있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데 의미를 둘 수 있다. 자기 얘기를 했기 때문에 당연히 다른 연구자들이 그 근거를 물어 비판할 수 있고, 그러한 토론과정을 통해 한국 철학을 만들어 갈 수 있으리라 희망한다. 갈 길이 멀다.

*** 우리말 철학사전1

신간은 12명의 전문가들이 과학. 인간.존재.문화.사회.언어.이성.이해.나.자연.자유.존재 등 서양철학의 핵심개념을 항목별로 나누어 집필한 책이다.

지난 5년간 우리사상연구소를 중심으로 박이문.김형효.장회익.백종현.이진우 교수 등 중견 철학자들이 함께 토론하고 준비해온 첫 결실이다. 어휘에 대한 정보를 단순 나열하지 않고, 한 항목에 원고지 1백20장 이상을 쓴 작은 논문 형식이다. 앞으로 또 5년간 48개 항목을 다룬 4권을 더 펴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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