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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여성 "평양식당서 5명 밥값 계산하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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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지난달 30일 주체사상탑에서 평양 시가지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한 레나테 홍 할머니(왼쪽)와 맏아들 페터 현철. [사진 레나테 홍]

지난달 26일 오후 4시20분. 중국 베이징을 떠난 지 1시간20여 분 만에 비행기는 평양 상공에 들어섰다. 멀리 대동강 줄기가 보였고 눈에 익은 평양거리 모습은 그대로였다. 입이 바싹 말랐다. 뭔가 머릿속을 후벼 파낸 듯한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홍옥근. 꼭 다시 만나자고 해놓고서…. 그가 더 이상 이 땅 위에서 숨을 쉬지 않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당신과 아이들을 하루에도 천 번, 만 번 생각하고 있소. 9월에 우리가 꼭 만날 수 있을 것으로 고대하오.” 그가 써 보낸 편지의 한 글자, 한 글자가 생생하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비행기는 ‘쾅’ 하는 굉음을 내며 활주로에 털썩 내려앉았다. 내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웠다. 그나마 옆자리의 맏아들 페터 현철이 꼭 안아주니 다소 진정이 된다. 남편 옥근의 젊은 시절을 쏙 빼닮은 현철은 여행 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충격이 쉽사리 가시지 않는 듯했다.

 도착 후 공항 청사로 무거운 발길을 옮겼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인지 세관을 거쳐 출입국관리소를 휘청거리며 빠져나왔다. 남녀 두 사람이 마중 나와 있었다. 초청자인 조선적십자회 소속의 직원들이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접어야 했다. 남편의 큰딸 광희는 안 보였다. 옥근이 재혼해 낳은 딸이라고 소개했을 때는 서먹했었다. 그러나 여행 내내 나와 두 아들을 살갑게 챙겨주던 착한 광희. 서로 팔짱을 끼고 붙어 다니다 보니 정이 깊이 들었다. 지난번 헤어질 때 그 아이는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울먹였다. 광희가 우리를 마중 나왔다면 남편의 빈자리가 이리도 허전하지 않았을 텐데.

레나테 홍(오른쪽)·홍옥근씨 부부와 아들 페터 현철. 생이별 한 달 전인 1961년 3월 찍은 사진이다. [사진 레나테 홍]

 호텔로 향했다. 오후 6시를 조금 넘긴 시간 천리마거리는 퇴근 무렵인데도 오가는 차량이 드물었다. 길가에 낯익은 건물이 보였다. 창광산려관. 2008년 남편과 광희를 만났던 곳이다. 눈가에 다시 물기가 차오른다.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를 태운 버스는 숙소인 보통강려관으로 더욱 속도를 냈다.

 함흥의 남편 묘소를 다녀온 후(본지 10월 11일자 12면) 우울했다.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조선적십자회는 지난달 29일부터 5일간 평양시내와 인근 명소를 보여주었다. 대동강 자라공장, 사과농장, 대성산 기슭에 자리한 평양민속공원, 경상유치원, 하나음악정보센터 등을 둘러봤다.

 주체탑에서 내려다본 평양의 거리는 4년 전보다 훨씬 활기차고 생동감이 있었다. 대동강변에는 서너 개의 크레인이 설치돼 큰 공사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 인근 승리거리 쪽으로는 독일 대도시에 세워진 것 같은 현대식 고층건물들이 자태를 뽐냈다. 건물 양쪽 벽면을 실린더처럼 원통형으로 마무리한 디자인이 무척 세련된 모습이다. 완공되지 않아 겉모습이 흉물스럽던 피라미드 형태의 유경호텔은 외장공사를 마무리했다. 색깔이 다소 우중충하고 단조로웠던 잿빛의 평양 건물들도 푸른색이나 붉은색 계열로 바뀌었다. 문수거리를 오가는 여성들의 옷차림도 알록달록 한층 화사해진 모습이고 행인들의 걸음걸이도 한결 느긋해졌다.

 물가는 4년 전에 비해 곱절 이상 올랐다. 2008년 7월에는 5인 기준으로 식사와 음료수를 포함해 20유로(약 3만원)면 충분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50유로가량을 내야 했다. 연구소 간부를 지낸 남편은 한 달에 약 1유로를 연금으로 받았다고 한다.

 10월 3일. 평양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중앙동물원을 들른 후 오후 5시에 귀국행 에어 차이나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고도를 높이며 하늘에 오르는 순간 남편을 향해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옥근, 안녕히 계세요. 당신을 만나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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