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화로운 공간 구성,실용적인 온돌·마루...창덕궁 연경당이 답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91호 22면

1 사랑채 마당. 마당은 비어 보이나 매우 중요한 기능적 공간이다. 계절·시간·행사에 따라 다양하게 가변적으로 잘 쓰여야 하기 때문에 ‘채우기 위해 비워져 있음’의 동태적이고 생산적인 공간인 것이다.

한옥은 우리가 살던 집이다. 그런데 잊히면서 낡게 되고 헐려서 사라져 버렸다. 대표적인 도시 한옥마을인 서울 가회동의 낮시간은 관광객들이 차지했고, 밤에는 불 꺼진 골목이 된다. 새로운 부동산 신화를 이루어낸 북촌마을은 높아진 가격만큼 차곡차곡 박제화되고 있다. 인사동길, 삼청동 갤러리길을 타고 확산하는 상업화는 일상적 주거 기능을 위협한다. 지원금에 의존하는 지방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민속촌 같은 박제화된 관광자원이나 출퇴근하는 사업용으로는 한계가 있다. 지속 가능한 일상적 삶이 이루어지는 주택으로서, 이웃이 있고 도시적 생활이 가능한 주거단지로서 현대화가 이루어져야 한옥은 비로소 길을 찾을 것이다.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한옥의 독창성을 올바로 해석해 내는 것이 필요하다. 근대화 이전까지 흔들림 없이 계승된 한옥 건축의 핵심 콘텐트는 무엇일까. 창덕궁 연경당이 그 답이다.

최명철의 집을 생각하다 <10> 한옥 살리기

연경당에 담긴 한옥 건축 핵심 콘텐트
1405년 태종이 경복궁의 이궁으로 창건한 창덕궁은 조선시대에서 가장 오랜 기간 정궁으로 사용됐다. 베이징의 자금성이나 경복궁처럼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자연 지형과 토착적 풍수지리에 따라 조화를 이루고 있어 가장 한국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또 왕가 생활에 편리함이 우선됐고 지형마다 친근감을 주는 구성으로 건축적 성취도 뛰어나다. 창경궁과 같이 동궐로 불렸으며 남쪽의 국가 사당인 종묘와 북쪽의 왕실 정원인 후원이 붙어 있어 최대의 궁궐 규모를 이루고 있다.이 후원에는 순조 28년(1828)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의례를 행하기 위해 창건한 연경당이 있다. 왕실에서 일반 사대부들의 일상생활을 경험해 보고자 지었기 때문에 가장 규범적인 건축 형식을 따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옥의 공간 구성은 같은 목구조에 기와지붕 형식인 중국이나 일본과 큰 차이를 보인다. 기본적인 모듈인 한 칸은 수평적이면서 보편적이다. 모든 채마다 홑집의 형태라서 중국이나 일본 건축에서 보이는 공간적 위계나 종속적 영역체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마당을 두고 펼쳐지는 집의 모습은 조금씩 다른 변화를 이루면서 조화롭다. 연경당의 120여 칸 역시 균질하게 펼쳐져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방 안에 앉아 있어 보면 몸의 기가 살아나는 느낌이 든다. 자기를 둘러싼 위(天)·아래(地)의 공간과 앞·뒤의 마당, 경계 없이 이어지는 마루 등 천지자연의 비어 있는 공간들과 바로 맞닿아 있다. 암자나 선방의 형국이어서 한 개인이 온전히 사유하는 전인적(全人的) 공간 구성이 된다. 이러한 홑집에서 방의 독자성은 자연과의 동화에는 유리하지만 자연으로부터의 보호(shelter)라는 점에선 취약하다. 이를 온전히 보완하는 수단으로서 온돌은 필수적이다.

2 안채에서 보는 사랑채의 팔작지붕. 3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사람이 드나들 수 있게 만든 작은 문. 4 안채와 사랑채가 한눈에 보인다. 마루와 방이 번갈아가며 자리하고 있다. 사진 Choi, Soonyoung, 도면 창덕궁 브로슈어

부뚜막(土) 속에 나무(木)를 넣고 불(火)을 지펴서 무쇠 솥(金)에 물(水)을 붓고 밥(五穀)을 짓는다. 이렇게 부엌에서 오행으로 만들어진 화기는 구들을 돌고 돌아 방안을 데우고 벽을 타고 오르며 목재인 기둥과 창호를 팽창시켜 외기를 차단하고 지붕까지 촉열채로 사용해 난방효과를 극대화한다. 취사용 에너지와 난방용 에너지를 동시에 해결하는, 세계적으로 유일하고 탁월한 시스템이다.

이러한 온돌방이 실(實)이라면 이에 대응하는 마당이 공간, 즉 허(虛)가 된다. 마치 동전의 앞·뒷면처럼 실내와 실외 공간의 대응, 즉 홑집으로서 온돌방과 마당의 1:1 결합이 한옥 공간 구성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마당은 비어 보이나 매우 중요한 기능적 공간이다. 계절·시간·행사에 따라 다양하게 쓰여야 하기 때문에 ‘채우기 위해 비워져 있는’ 동태적이고 생산적인 곳이다.

방과 마당을 이어주는 마루 역시 빼어난 공간체계다. 사계절에 걸쳐 마당과 더불어 가장 가득 차는 공간이다. 실내와 실외를 맺어주는 사이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적극적 공간 구성으로서 독립적 지위를 갖는다. 마치 중용의 도에 나오는 시중(時中·때에 맞춰 양극단을 포섭해 운행하는)의 공간으로서 한옥 공간 구성의 핵심이다. 대부분의 사회적 활동과 생산 활동의 장소이기도 하다.

한옥의 형태를 결정짓는 것은 지붕이다. 지붕은 예부터 하늘을 상징하기에 과다할 정도의 재료와 장식 및 공력을 사용했다. 연경당 120칸 기와지붕도 일견 동일한 모습이 반복된 것 같지만 하나하나의 변화에는 세심한 의도가 들어 있다. 개별적 한 칸의 평등하고 독자적인 공간체계와는 달리 그 위를 덮는 지붕의 구성은 신분이나 성별 또는 공간의 쓰임새까지 다양한 의미가 담겼다. 예를 들면 안채와 사랑채의 지붕은 연경당에서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이다. 양 끝단 누마루(바닥이 가장 높은 마루방)의 팔작지붕에서 시작해 서로의 높이를 맞물리면서 뒤편 안채와 연결된 사랑방의 지붕까지 팔작으로 마무리했다. 하늘의 기운으로 후손을 점지하고 싶은 의도를 다양한 조형미로 승화한 솜씨에서 선조들의 격조가 느껴진다.

한옥, 미래 주거양식으로 재해석해야
유럽의 르네상스는 중세 암흑시대 천년을 뛰어넘어 그리스·로마 시대로부터 오래된 미래를 끌어내 새로운 인류 문명을 탄생시켰다. 그리스신전과 로마의 건축술에 기초한 건축 형식의 재해석은 당대의 경제력과 인문학, 과학의 발전과 결합돼 서구의 건축양식으로 계승됐다. 더 역사가 오랜 한옥을 현대생활 속에서 어떻게 해석해야 하며 지속 가능한 미래의 주거양식으로 구현할 것인가. 오로지 우리의 노력과 창조적 역량에 달려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