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내다보는 외국계 자금 등장 한국 증시에 장기투자 몰려온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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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호 20면

근래 외국계 투자가와 만날 기회가 잦아졌다. 미국의 3차 양적완화 등 선진국들의 돈풀기 기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중에는 미 기업연금펀드(Corporate Pension Fund) 운용 담당자도 있었다. 이 펀드는 운용자산 총 400억 달러(약 44조원)를 넘는 거대 연·기금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개별 기업에 투자하는 평균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를 물어봤다. 자산운용업을 하는 입장에선 투자 기간은 무엇보다 관심사다.

증시고수에게 듣는다

기본적으로 단기투자자인지 장기투자자인지 알면 투자철학과 운용 전략·전술을 대체로 가늠할 수 있다. “장기투자가 원칙”이라는 원론적 답변이 돌아오길래 한술 더 떠 “특정 기업에 3년에서 5년 정도 투자하느냐”고 좀 더 캐물었다. 주변에 알고 있는 장기투자자들이래야 기껏 5년인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런데 매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30년-”. 깜짝 놀랐다. 국내 운용업계에선 그 누구보다도 장기투자의 시계(視界)로 투자한다고 자부해왔던 터라 더욱 그랬다. 30년이라면 국내 운용업계의 장기투자 틀을 뛰어넘는 초(超)장기투자라 할 수 있다.

“5, 10년 뒤 한국증시 밝다”
유럽의 통신회사 자금을 운용하는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를 만났을 때도 비슷한 원칙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를 투자파트너로 선택한 기준은 단기가 아닌 중장기 성과다. 무엇보다도 투자 철학을 꾸준히 지켜왔느냐를 중요하게 봤다”는 설명이었다. 30년을 묵직히 투자하려면 단기 모멘텀(Momentum·주가 변수)이나 트레이딩(매매)을 통해 몇 푼 버는 것보다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대한 구조적 변화를 읽고 이런 중장기적 흐름을 타야 한다. 미국 기업펀드나 유럽 운용사 모두 불안한 단기 경기 사이클에 근거한 전망보다 확실한 장기 전망을 믿고 투자에 임하려 하고 있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평균자산 500만 달러 이상인 부자들 자금을 운용하는 미국의 한 자산관리회사는 최근 신흥시장에서의 파트너를 구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브릭스(BRICs) 등 상당수 신흥시장이 불안한데도 돈을 빼기는커녕 도리어 더 넣겠다는 것이다. 이 회사는 신흥시장의 부진한 흐름에 대해 비관적이지 않았다.

유럽 재정위기 등 선진경제 불안에 따른 단기적 현상으로 보는 듯했다. 그중에서도 한국 주식시장에 대해선 그 어느 때보다 긍정적이었다. 이 회사가 한국 시장에 호감을 갖는 이유는 뭘까. 작금의 우리나라 경기사이클이 좋다고 보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5년, 10년 뒤 한국 주식시장의 구조적 변화에 거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외국계 펀드 중에 단기 투자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 외국계 단기 자금이 수시로 유출입되면서 한국 증시의 변동성을 키웠다. ‘외국인의 ATM(입출금기)’이니 하는 자조와 함께 외국계 투자자금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 하지만 요즘 한국 주식시장에 들어오는 외국계 자금의 상당 부분은 더 이상 단기 자금이 아니다. 심지어 30년 뒤를 보고 들어오는 자금이 있을 정도로 외국계 투자의 본류(本流)가 중장기로 옮겨가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국내 기관투자가들도 장기 투자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다. 펀드시장으로 몰린 개인자금이 과거 주식시장을 움직였다면 이제는 연·기금 등 기관투자가 비중이 커지고 있다. 은퇴 후 삶에 대비해 국민연금·퇴직연금 같은 중장기 금융자산이 늘어나는 사회적 흐름에 부응한 현상이기도 하다.
필자는 여간해서는 경기 사이클을 보고 주식투자를 하지 않는다. 특히 금융위기 이후에는 호·불황의 경기 사이클 구분 자체도 모호해졌다. 실제로 복잡다단한 대외변수가 많았던 올해 글로벌 주가수익률은 어땠을까. 경기선행지수나 경기동행지수 중 어느 것 하나 호전되지 않은 탓에 투자자들이 체감하는 수익률은 별로 좋지 않다. 그런데 실제 수익률은 예상과는 좀 다르다. 유로존(유로화 통용 17개국) 재정위기의 키를 쥔 독일의 주가지수는 22% 올랐다. 유로존 둘째 경제대국 프랑스 증시의 주가지수도 6% 올랐다. 폭풍의 핵이라던 이탈리아는 보합권이고, 스페인도 8% 하락했으니 지지고 볶은 것치고는 선방했다. 아시아에서는 한국·대만·인도네시아 등이 10% 정도 올랐다.

템플턴卿, “개별종목 가치가 중요”
이처럼 주가 움직임을 경기사이클로만 설명할 수 없게 됐다. 짧게 보면 주가 변동성을 가져올 이슈가 많지만 길게 보면 주가는 합리적 수준으로 귀결되는 경향이 있었다. 목전의 이슈에 휘둘리는 주가 예상으로는 좋은 수익률을 내기가 힘들다. 10년, 20년을 내다보는 투자를 하려면 내년 주식시장이 상고하저(上高下低)인지 상저하고인지 보다 중장기적으로 어느 자산에 투자해야 수익률이 높을지 고민하는 것이 긴요하다.

위대한 투자가로 불리는 미국 존 템플턴(John Templeton)경은 이렇게 말했다. “시장흐름이나 경제전망이 아닌 개별종목의 가치에 주목하라. 궁극적으로 개별 종목들의 움직임이 주식시장의 흐름을 결정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만약 주식시장의 흐름이나 경제전망에만 매달려 투자한다면 약세장에서도 상승하는 종목을 놓치거나 상승장에서도 소외된 채 하락하는 종목을 붙잡고 있는 우를 범할 것이다.”

한국경제의 저성장과 장기 침체 걱정이 태산 같지만 필자는 여전히 낙관론 쪽에 선다. 한국 시장에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외국인들의 ‘색깔’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멘텀 관점보다 중장기적 관점에서 한국시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한국의 경기 사이클보다 산업구조와 인구구조 변화, 국제위상의 추이, 금융자산의 구성 등 경제발전에 내재된 구조적 흐름이다. 국내 투자자들은 이런 분위기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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