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오락성을 깔아뭉개는 '테일러 오브 파나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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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한주에 몇편씩 보다보면 생기는 증상 한가지. 처음 본 영화라도 이영화, 전에 어디서 봤는데? 하는 착각이 들곤 한다. 스타들이 나오는 영화라면 증상은 더 심각해진다. 어떻게 보면 개봉작 중에서, 특히 상업영화 중에서 '튀거나 혹은 빛나는' 영화를 발견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은 노릇이다. '테일러 오브 파나마'는 최근 본 영화중에서 "좋다"라고 선뜻 말할 수 있는 영화다. 혹자들은 별로 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다소 허술한 구석이 있고, 기존 할리우드 영화의 오락성이 어느 정도 배제되어 있으므로. 하지만 이렇듯 품격있으면서 고전적인 미덕을 잃지 않는 영화를 본 건 오랜만인 것 같다. 최소한 국내 개봉작 중에서.

'테일러 오브 파나마'를 만든 건 존 부어맨 감독이다. 얼마전 국내 공중파 TV에서 이 감독의 근작 '제너럴'을 방영한 적 있다. 한 도둑의 일대기를 무척 코믹하게, 그러면서도 사회적 메시지를 간직하면서 풀어나간 수작이다. 존 부어맨 감독은 신비스러운 구석이 있다. 영국 출신이면서 이후 할리우드로 건너갔는데 '엑소시스트2' 등 그저 그런 영화를 만들어서 흥행에서 참패한 적 있다. 그런데 '엑소시스트2'가 그의 대표작이라 이해하면 곤란하다. 존 부어맨 감독은 서사극에 일가견이 있다.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 전설을 영화화한 '엑스칼리버' 같은 작품이 있었고, 현대사를 다룬 작품으로는 '비욘드 랭군'도 있다. 존 부어맨 감독이 특정한 역사적 사실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역사 속에서 살아숨쉬는 인간들, 특히 거짓과 사기, 그리고 범죄행각에 가담한 인간들의 모습을 그럴듯하게 영상으로 옮겨놓는 재주가 있다. '테일러 오브 파나마' 역시 마찬가지.

'테일러 오브 파나마'는 파나마를 배경으로 한다. 1999년 파나마 운하가 본국으로 반환된 이후 영국에선 스파이를 파견한다. 앤디 오스나드라는 인물. 그는 파나마에서 한건 올려 바로 은퇴할 계획을 갖고 있다. 오스나드는 파나마의 양복 재단사인 해리에게 접근한다. 해리는 유명인사들의 옷을 만들고 있지만 사실 그의 경력은 모두 날조된 것이다. 오스나드는 해리의 과거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해서 그에게 중요한 정보를 얻으려고 한다. 파나마 정부 고위층 인사들의 이야기를 전해듣기 위함이다.

이 영화는 촬영이 근사하다. 열정으로 들뜬 파나마의 거리 곳곳을 카메라로 스케치하고 있다. 실내 장면들도 마찬가지인데 배우들의 동선은 부드럽고, 이를 따라 잡는 카메라 역시 연속성을 내내 유지한다. 촬영감독은 '흐르는 강물처럼'의 필립 러셀롯.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낚싯줄의 미묘한 움직임까지 포착했던 그는 '테일러 오브 파나마'에서도 유려한 촬영솜씨를 발휘하고 있다. 사실 이 영화는 스릴러영화치곤 리듬이 그리 긴박하진 않은 편이다. 영화초반엔 거의 느려터진(!) 리듬감을 과시하고 있는데 필립 러셀롯의 빼어난 촬영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요한 힘이라고 할 정도다. '테일러 오브 파나마'가 남다른 품격을 갖는데는 배우 연기도 한몫을 한다. 영화' 샤인'으로 알려진 제프리 러쉬는 해리역을 연기하고 있는데 자신의 경력이나 가정생활에서 내내 거짓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가족을 지극히 사랑하는 이중적 캐릭터를 훌륭하게 소화하고 있다.

영화가 끝날 무렵, 해리는 자신의 사기행각을 모두 털어놓은 뒤, 가족들을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이 장면은 다른 할리우드 스릴러영화와는 뭔가 다르다는 인상을 남긴다. 첩보 스릴러영화지만 정작 주인공은 스파이가 아니라, 평범하면서 거짓말이 입에 붙은 어느 양복 재단사인 것. '테일러 오브 파나마'는 기존 할리우드 영화의 스파이 캐릭터가 얼마나 황당하게 묘사되고 있는지, 그리고 평범한 범인들 삶이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를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뛰어난 수작은 아니다. 그렇지만 최소한 한가지는 분명하다. 할리우드 영화이면서 오히려 다른 할리우드 영화의 오락성을 깔아뭉개는, 그리 흔치 않은 영화라는 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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