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시대의 문화와 언어' 좌담] "영어에만 매달리는 한국인에 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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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학 석학 클로드 아제주 : 튀니지 카르타고 출생. 파리고등사범학교 졸업프랑스 국가박사(언어학) 취득. 현재 콜레주 드프랑스 교수. 저서는‘언어의 구조’등 20여권.(왼쪽)
프랑스 전 문화장관 카트린 타스카 : 프랑스 리용 출생, 국립행정학교(ENA) 졸업. 그르노블 ‘문화의 집’총감독, 카날 오리종 사장, 문화장관 등 역임. 현재 상원의원(사회당)(오른쪽)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 언어학자인 클로드 아제주 박사(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69)가 지난 25일 방한했다. 주한 프랑스대사관 주최로 26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1회 동북아 프랑스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아랍어에서 중국어까지 동.서양의 20여개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아제주 박사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 이후 프랑스어권이 배출한 최고의 언어학자로 꼽힌다. 대회에는 전 프랑스 문화장관인 카트린 타스카(64)상원의원도 참석했다. 26일 서울 시내 주한 프랑스문화원에서 두 사람을 만나 세계화시대의 문화와 언어에 대해 의견을 들었다.

-유럽 특히 프랑스 문화에 대한 조예를 바탕으로 미국 작가가 쓴 소설 '다 빈치 코드'가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다. 45개 언어로 번역돼 지금까지 팔린 것만 2500만부가 넘는다. 전직 프랑스 문화장관으로서 '다 빈치 코드'의 성공을 어떻게 보는가.

카트린 타스카 프랑스 상원의원=문화상품에 있어 성공의 열쇠가 홍보 전략 쪽으로 옮겨가는 현상이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유럽에서 개봉되는 미국 영화들의 경우 홍보비가 제작비를 초과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다 빈치 코드'의 경우에도 홍보 전략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문화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배급과 배포를 지원하는 수단도 함께 강구해야 한다.

-언어학자로서 아제주 박사는 수많은 토착 언어가 급속히 사멸하는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이 문제가 세계화 추세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가.

클로드 아제주 박사=물론이다. 미국의 한 유명 사립대학 동창 모임에 우연히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각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력 인사들이 대거 모였는데 그 중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정치인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세계화는 바로 우리다(Globalization is us).'미국화가 세계화라는 얘기다. 미국이 힘을 바탕으로 자기 언어를 확산하는 점도 있지만 영어 이외의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자기 언어를 홀대하고 영어를 자발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점도 문제다. 한국어 어휘의 60% 이상이 한자어인데도 한국인들이 한자어를 버리고, 대신 영어 어휘에 문을 활짝 열고 있는 것은 깜짝 놀랄 현상이다.

-영어는 의사소통의 보편적 수단이 됐다.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미국의 정치.경제.문화적 힘의 불가피한 결과라고 보는데.

아제주=영어가 보편적 의사소통 수단이 됐다고 보는 것은 언론이 만들어낸 허구다. 영어의 지배를 거부할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각자 자기 언어를 보존하고 지키려는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

-언어적 다양성을 보존하려면.

아제주=현재 전세계에는 구어(口語)를 기준으로 약 5000개의 언어가 있다. 그중 매년 25개 정도가 사라지고, 그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2100년이면 500개 언어만 남게 될 것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다중(多重)언어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아시아권에서는 3중언어교육이 필요하다고 본다. 한국 같으면 모국어인 한국어에 영어, 그리고 다른 외국어 하나를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국어는 학교에서 배우는 언어가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집에서 배우는 언어다. 따라서 학교에서 가르치는 외국어를 기준으로 3중언어교육을 실시할 수도 있다고 본다.

-세계화의 격랑 속에서 문화적 다양성을 보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타스카=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가 추진 중인 국제협약을 조속히 채택해야 한다. 협약은 문화적 다양성을 보존하고 고양하기 위한 국제법규 제정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를 통해 일반 상품의 교역 질서가 점점 체계화하고 있듯이 문화상품을 위해서도 별도의 국제법적 질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와 함께 영화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처럼 이미지를 통해 생활방식과 사고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시청각물 제작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불가피하다. 1986~88년 프랑스는 국산 시청각물에 대한 쿼터제 시행 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이 문제는 유럽 차원에서 다시 논쟁의 대상이 됐지만 결국 쿼터제를 토대로 유럽 공동의 지침이 만들어졌다. 지금은 한국도 스크린 쿼터제를 실시하고 있다. 쿼터제는 문화적 다양성을 보호하고 촉진하는 구체적 수단이다.

-프랑스가 집착하는 '문화적 예외'의 원칙은 무엇인가.

타스카=문화적 예외의 원칙을 프랑스의 문화적 오만이나 지배욕, 우월감의 산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이 원칙은 문화적.지적 소산을 상품 교역의 일반적 규칙에 종속시켜서는 안 된다고 보는 전세계 창작자들의 공통 의지를 반영한 것이지 프랑스이기 때문에 내세우는 것이 아니다. 문화는 자기 존재를 구성하는 결정적 요소다. 따라서 국가는 정신적 창작 활동이 상업적 규칙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도록 보살필 책무가 있다.

-미국 문화와 비교해 프랑스 문화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타스카=문화의 진정한 힘은 확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용력에 있다. 즉 교류를 통해 다른 문화를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통합하는 능력이다. 미국 문화에도 물론 뛰어난 측면이 있다. 서로 우열을 따질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문화에 대한 정치적 의지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프랑스는 문화정책이 공적인 책임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는 반면 미국은 그렇지 않다.

-언어학적으로 가장 발달한 언어가 무엇이라고 보는가.

아제주=모든 언어 사용자에게 가장 발달한 언어는 자신의 모국어다.

만난 사람=배명복 국제문제담당기자
사진=변선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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