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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못하던 안철수, 성적 급상승때 IQ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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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지난해 9월 9일 경북대 청춘콘서트(대담 형식 강연회)에서 강연하고 있다. [중앙포토, 안철수 원장]

2011년 9월 6일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나올 듯하다 뜻을 접었다. 결과적으론 박원순 변호사에게 서울시장 후보직을 양보한 셈이 됐다. 그날 저녁 2곳의 여론조사기관은 안 원장과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를 놓고 대권 향배를 따졌다. 모두 안 원장의 우세를 점쳤다. 박 전 대표가 1위 자리를 내주긴 3년 만이었다. ‘안철수’란 이름 석자가 대한민국 정치의 한복판으로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메추리알 품은 아이

부산시 부산진구 범천동에 살던 유아 시절의 모습. [중앙포토, 안철수 원장]
부산고 재학 시절. 아래 가운데가 안 원장.

안철수는 1962년 2월 26일 부산시 부산진구에서 태어났다. 2남1녀 중 장남이었다. 의사인 아버지 안영모(81)옹은 최근까지 범천의원을 운영했다. 어릴 적 안철수는 말수가 적고 숫기도 없었다고 한다. 혼자 책을 읽거나 닭·토끼와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사물에 대한 호기심은 커서 메추리를 부화시키겠다고 이불 위에서 메추리알을 품고 잠들다 알을 깨뜨린 적도 있었다. 뭔가를 만지면 꼭 분해해 보곤 하면서 과학자를 꿈꿨다.

 하지만 성적표엔 수, 우가 별로 없었다. 안철수는 “‘수’가 보일 때가 있었는데 제 이름 철수의 ‘수’였다”고 방송에 나와 농담을 하기도 했다. 부산고 2학년이 돼서야 성적이 죽죽 올랐다. 이때 잰 IQ는 145였다. 그는 “어떤 일에 몰입하면 무아지경에 빠질 정도로 집중력이 좋았다”고 했다. 공대에 가고 싶었지만 부모님이 원하는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 1980년이었다.

 ◆컴퓨터 고치는 의사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만드느라 허겁지겁 군대에 갔다는 안 원장. 군의관으로 입대한 1991년 전투화를 닦고 있다. [중앙포토, 안철수 원장]

그는 82년 의대 본과 1학년 때 같이 하숙하던 친구의 애플 컴퓨터를 처음 접한다. 한눈에 매료됐다. 바로 컴퓨터를 샀다. 그런데 88년 초에 창궐했던 ‘브레인 바이러스’에 애지중지하던 컴퓨터가 감염됐다. 직접 고쳐보겠다는 생각에 치료 방법 개발에 몰두했고 결국 백신을 만들어냈다. 이를 플로피디스크에 담아 일반에 무료로 제공했다. 당시엔 인터넷이 지금처럼 보급되지 않던 시대였고, 백신 프로그램을 돈 주고 사고판다는 개념이 별로 없었다. 안철수는 이렇게 신종 바이러스가 나올 때마다 백신을 만들고 공짜로 뿌리길 7년을 거듭했다. 하지만 안철수는 상용제품을 개발한 96년 이후엔 유료정책을 썼다. 그가 설립한 안랩은 2007년 네이버의 보안 웹 무료서비스에 대해 크게 반발하며 법적 대응을 공언하기도 했다. “무료 백신 추세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것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2008년 안랩의 입장이었다.

 서울대·단국대 의대 조교, 일본 규슈대 방문연구원으로 일하면서도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컴퓨터 바이러스 연구로 아침을 맞았다. 91년 해군 군의관으로 입대하던 날 아침에도 백신 프로그램을 업데이트하느라 밤을 새웠다고 한다. 안철수는 “아내에게 군대 간다는 말도 안 하고 온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고 했지만, 부인 김미경 서울대 교수는 “남편이 송별회도 없이 허둥지둥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으로 가더니 입대해 버렸다. 돌아오는 길에 무지 섭섭했다”며 엇갈린 말을 한 적이 있다. 김 교수는 학내 봉사서클인 가톨릭학생회에서 만난 대학 1년 후배다.

 안철수는 입대 전 89년부터 1년반쯤 단국대 의대 전임강사와 의예과 학과장을 지냈다. 94년 제대한 그는 단국대에 복직을 신청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아 10개월간 실업자로 지냈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 바로 이 시기 서울대 의대의 조교수직 제안을 뿌리치고 창업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교수직 제안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어쨌든 그는 “컴퓨터를 하면서 느꼈던 성취감을 의학 공부로는 느낄 수 없었다”며 14년의 의학 공부를 포기했다.

 ◆CEO에서 대학 교수까지

신혼여행에서 부인 김미경 교수와 함께.

95년 3월엔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했다. 창업 후 3~4년간 직원 월급 줄 돈이 없어 김 교수 월급에 손을 댔다. “월말에 월급 줄 돈을 마련하느라 은행에 ‘어음깡’을 하러 가곤 했다. 창구 직원이 좋아하는 소보루빵을 사들고 갔다”고 회고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가운데도 97년 기업 경영을 배우러 미국 유학을 떠나 e-메일로 회사 일을 챙겼다. 미국과 서울을 오가다 급성간염으로 쓰러져 3개월간 입원했다. 그 사이 세계적인 백신업체 맥아피에서 1000만 달러에 회사 인수를 제안받았지만 거절했다고 안철수가 주장한 적이 있다. 이게 ‘안철수 신화’에 큰 영향을 줬지만, 실제 맥아피가 인수를 제안했다는 사실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맥아피가 안랩에 한국 내에 공동 개발·판매를 위한 합작법인 설립을 제안한 적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에겐 곧 기회가 찾아왔다. 99년 ‘체르노빌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면서 백신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고 회사는 창업 4년 만에 흑자로 전환됐다. 2001년 회사는 코스닥에 상장됐다.

 회사가 안정 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한 안철수는 2005년 대표이사직을 사임하고 부인과 함께 미국 유학을 떠났다. 안철수는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로, 부인은 워싱턴주립대로 향했다. 부부의 본래 전공과는 무관한 경영학, 법학을 전공하기 위해서였다.

 둘은 2008년 귀국 후 나란히 KAIST 교수, 2011년엔 모교인 서울대 교수가 됐다. 당시 학계에선 “안철수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김 교수까지 특채한 게 아니냐”는 시비가 나왔다. 또 안철수의 논문 발표 실적이 미미해 교수 임용 조건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안풍(安風)의 시작, 청춘콘서트

안 원장은 2009년 6월 MBC ‘무릎팍도사’에 출연하면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시청률이 20%를 찍었다.

 안 원장은 이즈음 ‘시골의사’ 박경철 안동신세계연합클리닉 원장을 만났다. 취업난에 허덕이는 지방대생들의 기를 살려줘야겠다는 뜻에서 2009년 청춘콘서트를 함께 진행했다.

 때마침 오세훈 서울시장이 2011년 8월 무상급식 주민투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중도 사퇴했 다. 이때 안철수가 지인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 의사를 밝혔다. 정치권의 숱한 러브콜에도 “관심 없다”고 번번이 퇴짜를 놨던 안철수가 이번만큼은 “시장은 바꿀 수 있는 게 많다”며 가능성을 열었다.

 그러자 여론조사에서 안철수는 정치권의 예비주자들을 앞섰다. 그는 그러나 불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그의 정치권 진입을 도왔던 인사들은 “안철수가 먼저 출마 뜻을 접은 뒤 양보하는 모양새를 취했다”고 말한다. 어쨌든 그 뒤부터 정치권엔 ‘안철수 현상’이란 신조어가 등장했다. 그는 서울시장 후보직을 양보한 직후 오히려 대선 주자로 위상이 커졌다. 그는 “대선 출마는 가당치도 않다”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정치를 안 하겠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서울시장 불출마 이후 그는 재산의 절반을 투입해 ‘안철수재단’을 설립하겠다는 계획(2011년 11월 14일)을 발표했 다. 그러곤 다시 잠행했다. 정치를 하겠다는 건지, 안 하겠다는 건지 답이 없었다. ‘안철수 피로현상’이 회자될 즈음 그는 『안철수의 생각』(7월 19일)을 발간하며 다시 대중 앞에 나타났다. 그러곤 꼭 두 달간 장고를 더 한 끝에 “더 많은 사람이 ‘안철수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다”고 판단을 내렸다.

양원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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