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Report] 빵이냐 돈이냐 원조보다 중요한 원조의 기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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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일러스트=이정권 기자]

베트남 수도 하노이와 항구도시 하이퐁을 잇는 100km 구간에선 요즘 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외국 차관으로 이뤄지는 베트남판 ‘경인고속도로’다. 공사가 끝나면 북부 베트남의 가장 큰 무역항인 하이퐁이 하노이에서 한 시간 거리로 가까워진다. 2008년 베트남 정부가 이 사업에 착수하자 선진국들 사이에 ‘원조 전쟁’이 벌어졌다. 내로라하는 선진국들이 앞다퉈 연 0.1% 금리에 돈을 빌려주겠다고 나섰다. 치열한 경쟁 끝에 중국·체코와 한국이 ‘원조할 권리’를 따냈다. 홍성훈 한국수출입은행 경제협력기획실 팀장은 “베트남 정부는 전체를 10개 구간으로 나눠 돈을 빌려주는 나라에 건설을 맡기는 방식으로 사업을 진행했다”며 “자국 건설업체들에 일감을 주기 위해 주요 선진국 정부들이 총력을 기울였다”고 설명했다.

 지난 14일 오후 프랑스 파리 프랑스개발기구(AFD). 프랑스의 공적개발원조(ODA)를 담당하는 이곳에 수출입은행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경제협력 전문가 세 명이 나타났다. 50년 넘게 이어져온 프랑스의 ‘퍼주는 기술’을 배우기 위한 거였다. 이들을 맞은 AFD 대외협력팀 담당자는 3시간 동안 프랑스의 원조정책을 설명했다. 그러나 한국 측이 기대한 ‘비법’은 없었다. “한국만의 고유한 전략을 마련하라”는 덕담을 들었을 뿐이다.

 글로벌 ‘원조 전쟁’이 격화되고 있다. 경기 침체에 맞서고 있는 각국 정부가 가장 확실한 수출방식인 원조를 크게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도국들이 몇 년씩 기다리며 선진국의 ‘선처’를 기다리던 시절은 옛날이 됐다. 정부 관계자는 “원조를 주겠다는 선진국이 줄을 서다 보니 최대한 좋은 조건을 얻기 위해 개도국이 선진국 사이에 경쟁을 붙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원조 초보’인 한국엔 힘겨운 상황이다. 한국은 지난 2010년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산하의 DAC(개발원조위원회)에 가입했다. 세계무대에 ‘원조를 받는 국가’에서 ‘원조를 주는 국가’로의 변신을 공식 선언한 셈이다. 한국은 2015년까지 현재의 원조규모를 2배 이상으로 올려야 한다. 치밀한 정책과 전략이 없이는 ‘퍼주기 논란’에 휩싸이기 쉽다. 이계우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ODA가 선진국이 희생하면서 못사는 국가에 돈을 나눠주는 것이라고 오해하기 쉽다”며 “원조는 주는 국가와 받는 국가 양측이 윈윈하는 ‘상호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에 가장 시급한 건 원조를 ‘주는 나라(공여국)’ 중심에서 ‘받는 나라(수원국)’ 중심으로 시각을 바꾸는 일이다. 원조를 둘러싼 국내의 논의는 아직 무상지원이냐, 유상지원이냐를 따지는 수준이다. 기획재정부 산하인 수출입은행(EDCF)이 유상지원을, 외교부 산하 국제개발협력단(KOICA)이 무상지원을 각각 맡고 있다. 이런 방식은 프로젝트 단위의 효율적인 지원이 어렵다는 지적을 받는다. 실제로 최근 대외 원조가 늘면서 같은 국가의 비슷한 프로젝트에 중복지원이 이뤄지는 경우가 빚어지기도 한다. 정혁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수원국의 필요는 뒷전으로 하고 국내 상황에 맞춰 원조를 진행하면 원조의 효과나 지속가능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친구가 되자며 하는 원조로 수원국의 마음을 잃기 쉽다”고 꼬집었다.

14일 프랑스개발기구(AFD)에서 한국 경제협력 전문가가 프랑스 전문가와 토론하고 있다.

 프랑스 못지않게 오랜 원조 경험을 가진 독일은 원조기관을 기능별로 나눠 이 문제를 해결했다. 독일재건은행(KfW)이 금융협력을, 독일국제교류협력단(GIZ)이 기술협력을 전담한다. 학교를 지어줄 경우 KfW가 빌려준 차관으로 건물을 올리고 교육시스템 구축은 GIZ가 맡는 식이다. 독일 경제개발협력부(BMZ)의 기획재무책임 리타 월라프는 “다른 두 기관에서 같은 역할을 담당할 경우 수원국에 혼란을 줄 수 있다”며 “각 기관이 전문성을 갖춘 분야만 맡도록 역할을 분리했다”고 말했다.

 ODA의 목적을 명확히 하는 것도 과제다. 선진국들은 지난 50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선순위를 갖고 있다. 프랑스에서 국가대 국가 원조의 70%를 시행하는 AFD는 과거 식민지가 많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총 원조액의 40%를 지원한다. 안보와 경제에서 이들 지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프랑스 개발그룹인 프로파코(Proparco)의 운용 부책임자인 제롬 버트란드-하디는 “프랑스에서는 아프리카를 우선 지원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며 “공적원조의 규모가 줄어들더라도 이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국은 아프리카의 경제적 잠재력을 고려해 지난 2009년까지 공적개발원조(ODA)의 45.7%를 아프리카에 ‘올인’했다.

 지난해 선진국의 ODA는 경제위기의 ‘폭풍’을 그대로 맞았다. 전세계 공적 원조규모가 14년 만에 처음으로 감소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ODA를 유지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독일 KfW 동아시아·태평양 지역 책임자 마틴 도셸은 “정부 재정압박을 피하기 위해 은행에서 자체적으로 시장 재원을 조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양한 재원을 확보해야 정부의 주머니 사정에 의해 쉽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독일과 프랑스가 주목하는 한국의 강점은 ‘경험’이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가 된 한국의 발전경험 자체가 무형의 원조자산이라는 것이다. 기재부는 현재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을 대상으로 KSP(경제발전경험 공유프로그램)를 운영 중이다. 허경욱 주OECD대표부 대사는 “KSP사업을 중심으로 현재의 문제점을 보완해 ‘한국형 ODA’의 틀을 잡아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크푸르트·파리=김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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