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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87) 쑹칭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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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1월 1일, 쑨원·쑹칭링 부부는 2년 전 목숨을 구해준 경호원들에게 직접 훈장을 달아줬다. 탄후이촨과의 인연도 이때 시작됐다. [사진 김명호

쑨원 사망 56년이 지난 1981년 5월 14일 밤, 중국 국가 부주석 쑹칭링(송경령)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고열로 온몸이 펄펄 끓었다. 이튿날 새벽, 잠시 정신이 들자 병문안 온 저우언라이(주은래)의 부인 덩잉차오(등영초)와 중공 정법위원회 서기 펑전(진)에게 입당(入黨) 의사를 밝혔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세 번 반복했다.

쑹칭링의 입당 요구는 처음이 아니었다. 1958년 저우언라이에게 입당을 자청했을 때 “한동안 당 밖에 있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유리하다. 입당을 안 해도 우리는 모든 일을 수시로 보고하고 고견을 듣겠다”는 대답이 돌아오자 어찌나 훌쩍거리며 울던지 옆에 있던 류샤오치(유소기)가 혼비백산한 적이 있었다.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반세기 동안 형제들과 결별까지 해가며 중공을 지지한 쑹칭링의 마지막 소원을 못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정신이 조금이라도 있을 때 해주자는 공감대가 전화 몇 통으로 형성됐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었다. 몇 시간 후 중공 중앙 정치국은 긴급 회의를 열었다. “열렬히 환영한다”며 쑹칭링의 입당을 의결했다. 그날 밤, 중공 중앙과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代), 국무원은 “중국 혁명의 선구자 쑨원 선생의 부인이며 국제적으로 공인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여성, 쑹칭링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동시에 발표했다.

다음 날 오전, 권한은 있어도 책임은 없는 최고 실권자 덩샤오핑(등소평)이 쑹칭링을 찾아왔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당 중앙은 선생의 의견을 존중한다. 만에 하나, 예측치 못한 일이 발생할 경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겠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주기 바란다. 아무리 사소한 내용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겠다.”

쑹칭링은 “유구한 역사에 비하면 인간의 생명은 보잘것없는 것”이라며 ‘국제문제와 인류의 진보, 아동 교육의 중요성’ 외에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타이완과 미국에 있는 동생과 친척들이 장례식에 오겠다면 허락해 달라는 얘기를 할 법도 했지만 입에도 올리지 않았다. 덩샤오핑은 죽음을 앞둔 귀부인의 자존심에 혀를 내둘렀다. 같은 날 오후, 전인대 상무위원회는 “쑹칭링에게 중화인민공화국 명예주석 칭호를 수여하자”는 중공의 건의를 통과시켰다.

덩샤오핑을 필두로 국가주석 리셴넨(이선념), 당 총서기 후야오방(호요방), 총리 자오즈양(조자양), 군 최고원로 네룽전(섭영진), 친자식이나 다름없는 랴오중카이(요중개)와 허샹닝(하향응)의 아들 랴오청즈(요승지) 등 최고위급 인사들이 신중국 최초의 명예주석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병실에 줄을 이었다. 축하를 겸한 작별 인사나 다름없었다.

쑹칭링의 병세는 매시간 전파를 탔다. 전 세계에 널려 있는 중국인들은 뉴스를 들으며 숨을 죽였다. 장제스(장개석) 사망 후 뉴욕에 머무르던 동생 쑹메이링(송미령)과 타이완 총통 장징궈(경국)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세상 떠날 날이 임박했다는 것을 안 쑹칭링은 외부세계와 마지막 대화를 시도했다. 베이징 교외 샹산(香山) 언저리에 사는 탄후이촨(담혜전)의 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몇 달 전, 덩잉차오가 쑹칭링을 대신해 탄후이촨의 가족들과 찍은 사진을 바라보며 위로를 삼는 수밖에 없었다.

20년 전, 88세로 세상을 떠난 탄후이촨은 쑨원·쑹칭링 부부와 기막힌 사연이 있는 사이였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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