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대기록에는 숙명적인 면이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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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랜디 존슨(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이 노히트노런을 기록한다면 팬들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노히트노런보다도 더 희귀한 기록인 1경기 20탈삼진의 대기록을 달성했던 대선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말이다.

실제로 존슨은 시애틀 매리너스 시절인 1990년 6월 2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를 상대로 2-0의 노히트 노런을 기록함으로써 팬들의 이같은 욕구를 채워 주었다.

그런데 9년이 지난 1999년 6월 25일, 존슨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정말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전에 등판하며 1실점으로 호투했지만, 상대선발투수였던 호세 히메네스는 이보다 더하게 단 한개의 안타도 단 한점도 허용하지 않으며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던 것이다.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던 투수가 노히트노런의 제물인 되기도 한 기막힌 사건이 이루어진 것이다.

대기록을 작성하기 위해선 먼저 대기록의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

아마도 이 명언을 가장 잘 실천했던 인물은 바로 리키 핸더슨(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이 아닐까 싶다.

가장 깨지기 힘든 기록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놀란 라이언의 5714탈삼진의 대기록 속에는 핸더슨이 있었다. 1989년 8월 22일, 라이언은 핸더슨을 상대로 탈삼진을 거두며 역사상 최초로 5천탈삼진 고지에 올라섰다.

지난 4월 26일, 핸더슨은 필라델피아 필리스전에서 산 2063번째 볼넷을 얻어내며, 베이브 루스가 가진 이 부문 기록을 넘어선 영웅으로 남게 되었다.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레지 잭슨을 앞세운 오클랜드 어슬레틱스는 월드시리즈 3연패라는 대위업을 달성했다.그런데 이 시기에 남아있는 대기록은 이것만이 아니다. 똑같이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놀란 라이언은 3년 연속 3백 탈삼진이라는 대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26년이 지난 뒤에도 이같은 기록은 반복되었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뉴욕 양키스가 월드시리즈를 3연패했고, 이와 함께 랜디 존슨도 이 기간 동안 3년 연속 3백 탈삼진이라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만약 올시즌에도 존슨이 3백 탈삼진을 달성한다면 양키스도 그와 함께 월드시리즈 4연패를 이룩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 가지가 더 있다. 양키스의 월드시리즈 3연패는 1974년의 어슬레틱스 이후 26년만의 일이었는데, 2000시즌 양키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은 그들의 26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이었고, 월드시리즈 MVP도 26살의 데릭 지터가 차지했다.

숫자 44는 특히 대기록에 관련이 깊다. 가장 많은 홈런을 기록한 행크 애런의 등번호가 44번이었고, 가장 많은 안타를 쳐냈던 피트 로즈가 가진 내셔널리그 최다 연속경기안타기록은 44경기였다. 물론 조 디마지오가 연속경기안타 기록을 경신한 것도 44년만의 일이기도 하다.

20세기 마지막 해인 2000시즌에도 44와 관련된 사건이 있었다. 뉴욕 양키스와 뉴욕 메츠가 맞붙은 월드시리즈는 1956년 브루클린 다저스와 뉴욕 양키스가 대결했던 월드시리즈 이후 44년만에 벌어진 지하철 시리즈였고,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호세 리마는 47개의 홈런을 허용하며 1956년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로빈 로베르츠가 보유하고 있던 46개의 피홈런을 넘어서며 44년만에 내셔널리그 투수최다 피홈런 기록을 경신했다.

1997년 플로리다 말린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은 팀창단 이후 최단기간 시리즈 우승(5년)이라는 이정표를 세운 것이었다. 그러나 플로리다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담겨 있는 의미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월드시리즈 MVP를 차지했던 리반 에르난데스(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플레이오프에서도 MVP를 차지해 역사상 최초로 플레이오프와 월드시리즈 MVP를 동시에 차지하는 선수로 기록되었다.

또한 에드가 렌테리아(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자이언츠와 맞붙은 디비전시리즈 1차전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 모두 끝내기 안타를 침으로써 플로리다의 첫 포스트시즌 경기와 현재까지 그들의 마지막 포스트시즌 경기에서 끝내기 안타를 기록한 진기록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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