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섭의 영화 질주] '썸머 타임'

중앙일보

입력

"뉴욕의 하수구에 악어가 나타났다는데…. "

" '전자레인지를 돌렸는데 평소 아끼던 강아지가 그 안에 있더라고…. " 이처럼 한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오싹한 괴담을 흔히 '도시의 전설' 이라고 한다.

'전설의 고향' 이 면모를 일신한 듯한 이런 루머는 도시인의 소외감이나 불안감, 혹은 금기의 그물망을 타넘는 현대인의 집단적 욕망을 자양분 삼아 온 저자거리를 휘휘 젓고 다닌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에는 이러한 전설이 없을까?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삼팔반점 인육만두' 와 화장실 낙서의 대명사인 '잠자는 누나' 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도시의 전설 중 하나다.

후자의 경우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어느 날 친구의 집에 갔더니 대청 마루에 누나가 잠들어 있었고, 이 누나와 은밀한 성관계를 맺었다" 고 주장한다.

이 '잠자는 누나' 야말로 '잠자는 숲속의 미녀' 나 '보쌈한 과부' 의 포스트 모더니즘판이 아닐까 싶다.

지난주 개봉한 박재호 감독의 '썸머 타임' 은 '포르노그래피, 그 이상의 흥분' 이라는 문구를 내세운다. 노골적인 육체의 전시로 스크린을 메운 기존의 영화들과 뭔가 다른 차원의 문제의식을 내포하고 있다는 전언일 게다.

박감독은 포르노그래피 그 이상의 '이상' 으로 '썸머 타임' 의 배경에 1980년대의 광주를 끼워넣는다. 수배 중인 대학생 상호는 변두리의 허름한 목조 건물로 숨어 들고, 거기서 가학적인 남편에게 갇혀 사는 희란을 만난다.

그렇다면 아래층 여자를 훔쳐보는 대학생의 밀폐된 윗방은 어두컴컴한 기억만이 가득한 80년대의 유폐된 집이란 말인??또 두 사람의 자폐적인 정사는 세상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는 군부독재 시대를 위무하는 존재론적인 몸짓이란 말인가?

흥미롭게도 '썸머 타임' 의 이면에는 시대의 상흔을 씻김하는 정사의 극대치는커녕 '잠자는 누나' 의 전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그저 그런 집단적 욕망의 대속(代贖) 만이 엿보인다.

남편이 아닌 젊은 남자의 몸을 알아채고도 그를 맞이하는 여자의 모습에는 훔쳐보기의 쾌감과 은밀한 화간의 팬터지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영화는 사적 공간에 침입한 낯선 이와의 일회적 성관계와 처벌이라는 금기의 영역을 다룬다.

'거짓말' 이나 '감각의 제국' 이 개봉된 이후, 대한민국 영화계에는 극단의 표현수위로 시대를 대변하겠다는 말썽꾸러기 영화가 속속 선을 보이고 있다.

반대로 요즘의 대한민국 성인 에로물은 주류 영화의 때깔을 내려고 안간힘이다. 이들 에로물은 관객을 행위의 구경꾼이 아닌 실제 행위자(배우) 의 관점에서 경험케 하는 듯한 '주관적 시점화' 로 연출을 업그레이드했다.

이러한 면에서 '썸머 타임' 은 시대착오적이다. 영화는 후텁지근한 도시 야담의 맥을 잇고 조야한 성인 에로물에 근접하느라 헛되게 기력을 쇠진한다.

시대정신이라는 포장을 두른 에로물에 대한민국 일류 여가수가 옷을 벗고 수억의 돈을 댄 제작사의 행태가 2001년의 도시 괴담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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