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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알까, 아까워서 아껴 듣는 심정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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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호 27면

폴 클레츠키 지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반주로 요한나 마르치가 연주한 멘델스존과 베토벤 작품 음반. 이 음반이 포함된 10장짜리LP세트는 국내에서 70만원 안팎에 판매된다. EMI 음원을 요한나 마르치 전문 음반사인 쿠다르쉐에서 최근 복각했다.

시작은 힐러리 한이었다. 웃는 표정을 거의 보여주는 일 없는, 차갑고 도도한 암고양이 인상의 힐러리 한에게 납작 엎드려 경배하는 애호가가 참 많다. 이제 30대 초반으로 아름다운 외모와 더불어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한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의 지난 6월 내한공연 후기를 읽고 있었다. 감상을 적어나가는 음악 평론가는 이 연주가 어찌 소문처럼 차가운 얼음공주의 연주냐며 감탄을 거듭한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는 정제수와 같다며. 내게도 다섯 장의 힐러리 연주음반이 있다. 그 유명한 바흐 바이올린 솔로 파르티타 제2번의 샤콘을 먼저 걸어본다. 그녀의 데뷔 음반이기도 하다. 역시 오랜 세월 익숙하게 들어온 헨릭 셰링의 물기 가득한 연주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감정이 끈적하게 묻어나는 구세대 셰링과는 아예 다르게 접근하기로 작정한 연주인 양 청명한 바흐를 힐러리가 들려준다. 이것을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詩人의 음악 읽기 ]요한나 마르치와 마이클 래빈

힐러리 한의 내한공연 기사 앞줄에 그녀의 대선배들인 여류 바이올리니스트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지난 세기 세상을 주름 잡던 이름들인 에리카 모리니, 지오콘다 드 비토, 지네트 느뵈, 롤라 보베스코, 요한나 마르치, 이다 헨델, 에디트 파이네만… 음반 수집가들에게는 모두 하늘의 별 같은 존재들이다. 각각의 전설을 품고 있는 이들의 연주는 이제 시디를 통해 그리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건만 LP 애호가에게는 얼마나 난감한 성채인지. “요한나 마르치가 한 장 나왔는데 100만원이 넘는대!” 따위의 감탄과 탄식이 판동네에 떠돌고는 한다. 옛것과 희귀가 만나면 값은 하늘을 모르고 뛴다. 결국 나의 요한나 마르치 LP는 10장 한 세트로 구성된 복각본(리이슈)으로 낙착됐다. 똑같은 복각본인데도 단지 마르치라는 이름 때문에 값은 훨씬 비쌌다. 아까워서 거의 틀지도 않고 있다가 마르치를 알 만한 사람이 찾아오면 선심 쓰듯 한 번씩 슈베르트 소나타나 바흐 무반주 솔로곡을 틀고는 한다.

빛나는 존재는 어째서 빛나는 걸까. 물론 그 존재감 때문이다. 아무거나 음반을 틀면 하염없이 소리가 쏟아져 나오건만 어떤 존재는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매우 특별한 느낌을 안겨준다. 서른 살에 비행기 추락으로 세상을 떠난 지네트 느뵈를 들을 때면 언제나 연주와 죽음이 함께 교차한다. 에리카 모리니의 기품이나 롤라 보베스코 연주의 친근함도 그렇다. 그런 점에서 불과 40대 초반에 음악계를 실질적으로 떠나버린 요한나 마르치야말로 간절함을 안겨주는 존재가 아닐까 싶다. 일단 생전의 음반 발매량 자체가 많지 않다. 레코딩을 마치고서도 마음에 들지 않아 출시를 거부한 음원들도 있다.

루마니아 태생으로 55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크게 두드러지는 인생 이력을 남긴 바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녀를 찾아냈다. 한 번 들어보기 힘든 연주라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수집가들에게 마르치의 음반은 마치 필생의 소망처럼 여겨져 그 가치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었다. 귀한 존재는 그렇게 해서 긴 세월에 걸쳐 형성됐다. 어떤 음악 애호가가 마르치 음반을 걸어놓고 한가로이 딴청을 부리겠는가. 자세를 바로 하고 귀를 집중할 때 요한나 마르치는 거의 틀림이 없다. 따뜻함, 품위, 섬세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연주의 완결성. 내게 있는 10장의 마르치 LP 가운데 소홀히 흘려들을 연주는 하나도 없었다.

거듭 말하지만 음악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연주자의 존재감을 의식하는 것이 첩경이다. 지금 이 사운드의 주인공은 어떤 인물이고 생의 어떤 시기에 연주를 했는지. 연주자를 의식하지 않으면 음악은 구체성을 잃고 상념의 백뮤직으로 추락하기 쉽다. 요한나 마르치가 특별한 느낌을 안겨주는 것과 흡사하게 매우 특별한 또 하나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마이클 래빈(작은 사진)이다.

어린 나이에 천재로 각광받은 연주자가 꽤 있지만 마이클 래빈은 이미 열 살 무렵부터 대연주가 대접을 받았다. 어린 나이의 엄청난 성공이 성품을 그르쳤던 모양이다. 그는 마약중독과 노이로제 증상을 안고 거의 막 살다시피했다. 그리고 불과 서른다섯 살에 복도에서 비틀거리다 넘어져 머리를 다쳐 죽은 황당한 생애. 그런데 음반에 남겨진 그 연주력은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다. 조심스러운 마르치와 완전히 정반대의 호쾌하고 거침없는 보잉을 펼치는데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게 한다. 혹시 그가 오래 살았더라면 젊어 천재, 나이 들어 범재로 추락한 루지에로 리치처럼 되었을까 아니면 바이올린 연주 사상 최고의 인물로 등극했을까. 어쨌거나 많지 않은 래빈의 연주 모두가 최상급이라고 보아도 틀림없다.

평범한 연주자의 평범한 연주를 사랑하고자 한다. 희귀 음반 따위에 너무 집착하지도 말자. 이게 내 신념이라 할 수 있는 평소 생각이다. 그런데 요한나 마르치와 마이클 래빈이라니! 신념을 뚫고 나와 “우와!” 하는 경탄으로 끌고 가는 저 스페셜리스트들에게 항복하고 만다. 특별한 연주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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