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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하는 일은독자에게 말걸기책 한 권에꼬박 한 달 걸리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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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호 17면

『연금술사』(파울로 코엘료·문학동네), 『공중그네』(오쿠다 히데오·은행나무),『 즐거운 나의 집』(공지영· 푸른숲),
『흑산』(김훈·학고재),『박완서 소설전집 결정판』(세계사)…. 단순한 베스트셀러의 열거가 아니다. 공통점이 있다. 오진경(40)이란 이름 석 자다. 책들의 표지는 물론 제목과 본문의 서체, 그림, 판형, 심지어 어떤 가늠끈을 사용할 것인가까지 그가 정했다. ‘책에 보여지는 모든 것’을 디자인한 셈이다. 지금껏 이렇게 작업한 국내 서적만도 1000권이 넘는다. 특히 소설 분야에서 발군의 북 디자인 기획력을 선보이고 있는 그를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초가을 오후 만났다.

베스트셀러 단골 북 디자이너 오진경

튀는 일러스트 표지로 이름 알려
5일 오후 서울 동교동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10평이 채 안 되는 오피스텔 한 벽면이 책으로 가득했다. 모두 그의 손을 거쳐 탄생한 ‘작품’들이었다. 『우리는 사랑일까』(알래드 보통·은행나무),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박민규·한겨레 신문사), 『 7년의 밤』(정유정·은행나무) 등 한 번쯤 읽어본 책들이 줄줄이 꽂혀 있었다.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이런 표정을 눈치채기나 한 것일까. 그가 입을 열었다.
“책 한 권을 읽었다는 건 단순히 원고에 대한 기억만이 아니죠. 책이 책장에 꽂혀 있을 때 느껴지는 책 등의 뉘앙스, 흘려 쓴 듯한 제목, 커버에 두른 띠지, 그리고 책에 대한 기사 등 이런 모든 게 총체적으로 독서의 경험이 되죠. 우리가 블로그나 프린트물을 ‘독서’라고 하진 않잖아요. 글만 가지고 저자를 만나는 게 아니라 구조들 속에서 책이 생기니까요. 그중 가장 강력한 것이 시각적인 부분이고. 그래서 북 디자인을 단순히 패키지라고 하기에는 뭔가 설명이 안 되는 것이 많아요.”

오씨 역시 북 디자이너가 되기 전까지는 몰랐던 부분이었다. 홍익대 시각디자인과를 졸업하고 광고회사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다 출판계로 전업한 건 1998년. 막연히 편집 디자인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다. 마침 지도교수였던 안상수 선생이 “문학동네에서 북 디자이너를 뽑는다고 하니 이문재 주간을 찾아가 보라”고 했다. 당시로선 드물게 문학동네는 이미 사내에 3명의 북 디자이너가 일하고 있었다.

입사한 뒤 소설책을 처음 디자인했을 때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신인작가 이응준의 『내 여자친구의 장례식』(문학동네)이었다. “지하철에서 원고를 읽는데 너무 설레더라고요. 책이 나오기 전의 ‘날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게. 그리고 이걸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 온전히 내 손에 달렸다는 게.”
이후 그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북 디자인에 푹 빠져 지냈다. 처음엔 ‘책 같지 않다’는 핀잔도 들었지만 2년쯤 지나자 ‘격’에 맞는 디자인도 나왔다. 자연스럽게 디자인팀장까지 맡다 2002년엔 스튜디오를 차려 독립했다.

프리랜서로 나서고도 일감이 떨어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업계에서 남다른 대접을 받은 건 3~4년이 지난 뒤였다. 2005년 『지문사냥꾼』(이적·웅진지식하우스)과 2006년『남쪽으로 튀어』(오쿠다 히데오·은행나무)의 표지 덕분이었다. 제목보다 튀는 일러스트가 남달랐다. 특히 『남쪽으로 튀어』는 새로운 디자인을 원했던 출판사에서도 막상 보여주니 ‘으악’ 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밀어붙였다. 결과는 성공. 이후 일본 소설에 일러스트를 넣는 것은 하나의 트렌드처럼 번졌다. “표지는 표지의 역할이 있죠. 말하자면 독자에게 말을 거는 방식이에요. 글자 크기, 문체, 색깔 각각이 목소리를 가져요. 다정하게, 무뚝뚝하게, 단호하게 그런 식으로요. 한마디로 책의 태도랄까.”
그는 당시 독자들의 취향을 재빠르게 파악하고 있었다. 블로그·미니홈피가 처음 유행하면서 지극히 개성 있는 스타일을 원할 때였기 때문이라 먹혔다. 그렇다면 현재 ‘표지의 트렌드’는 뭘까. “일러스트가 가득한 표지는 이제 너무 많아요. 오히려 독자들이 시끄럽다고 느낄 정도죠. 그래서 이젠 여백이 있고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디자인이 더 독자의 시선을 끌게 될 거예요.”

한데 정작 오씨가 공을 들이는 건 표지가 아니란다. 바로 면지(커버와 본문 사이에 들어가는 종이)다. 표지가 굉장히 화려한 세계라면 면지는 단순히 읽는 세계라는 것. 아무것도 없는 종이를 넘기면 제목을 한번 더 언급해 주고 차례를 말해주고 전체적인 뉘앙스를 풍겨준다. 그래서 독자가 책을 펼치고 몰입할 수 있도록, 책의 문을 열어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진짜 첫 문장을 만나는 순간까지 자상하게 배려가 돼 있지 않으면 독서를 풍부하게 경험하기가 힘들죠. 잘된 책과 잘못된 책의 기준은 이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디자이너가 가장 잘 연출해야 할 부분도 그래서고요.”

세상사에 대한 공감이 디자인의 힘
업계에선 그에 대한 공통된 평이 있다. ‘텍스트에 대한 공감력이 뛰어나다’는 것. 오씨 스스로도 “원고에 몰입하지 않으면 디자인이 성공적으로 나올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감정 이입이 쉽게 되고, 디자인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소설책 디자인을 장기로 삼는다. 하지만 한 달에 두 권 이상 소설책을 만들지는 않는다. 역할에 몰입해야 할 배우가 겹치기 출연을 못 하는 것처럼. 디자이너도 소설의 스토리에 푹 빠져 살기 때문에 ‘드라마가 섞이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한 권을 완성하는 데 보통 한 달쯤 걸리는데 시리즈라면 세 배쯤은 예상해야 한다.

이쯤에서 궁금했다. 승승장구하는 디자이너라고 아쉬움이 없을까. 그래서 물었다. ‘내가 해봤으면’ 싶은 욕심 나는 책, ‘다시 했으면’ 하는 후회되는 책은 없느냐고. 그는 ‘없다’고 단언했다. 웬만한 베스트셀러는 다 해봤으니 그렇고, 최선을 다했으니 돌이킬 필요가 없다는 얘기였다. 굉장한 자신감이었다. 그렇다면 한번 더. ‘베스트셀러가 될 만한 책들을 맡는 것일까, 아니면 디자인이 좋아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일까’. 이번에도 단호했다. “당연히 후자죠. 김훈이나 공지영 책이 모두 잘 팔리는 건 아니잖아요. 내가 했다면 몇만 부는 더 팔렸을 텐데 하는 책들도 있죠. 저는 디자인은 말을 거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대화의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책들이 있어요.”

현재 그는 연말까지 작업할 책들이 다 결정돼 있다. 대략 20여 권. 이 중에는 소설가 황석영의 등단 50주년을 기념해 만드는 전집의 리뉴얼도 포함돼 있다. 지금도 출판사의 러브콜이 쇄도하지만 더 이상은 무리라 받고 있지 않다. 몸값 높은 디자이너가 된 비결을 물었더니 처음엔 “자기 일처럼 해주니까요”라는 교과서적인 답을 했다. 그러다 다시 말을 이었다. “얘기를 잘해요. 디자이너 중에 저처럼 사람 만나 얘기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별로 없죠. 출판사 편집자는 글로만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난 그것을 시각적으로 연결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신문·잡지를 보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을 넓혀야죠. 책이라는 사각형 세계 안에서 조형만 치열하게 고민하는 분들이 있지만 난 이것이 도대체 바깥세계의 무엇과 닿아 있는지를 파고들어요. 그것을 편집자와 계속 토론하고. 그래서 나중엔 제목까지 골라달라고 하고, 대박이 날 것 같은지 물어보기도 하고 그러죠(웃음).”

그는 원래 디자인이 좋아서 일을 시작했는데 이젠 책이 더 좋아진다고 했다. 책이 디자인을 통해 완결되는 그 과정이 언제나 굉장히 신기하고 매력적이라는 이유였다. 인터뷰 말미에 그에게 베스트 디자인을 골라달랬더니 죄다 최근 책들만 내놨다. 『흑산』『월든』(헨리 데이비드 소로, 현대문학) 등 간결하면서 단아한 모양새였다. 이유를 물었더니 이전에는 장난끼 있고 발랄한, 약간 수줍은 듯한 디자인이었다면 이제는 좀 더 당당해졌기 때문이란다.
“예전엔 일을 하면서도 좀 긴가민가했는데 요즘엔 내 결정에 확신이 들어요. 북 디자인 실무서를 직접 써보겠다는 욕심도 이젠 슬슬 생겨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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