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외화번역 1인자 이미도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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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화번역은 활어(活漁)를 요리하는 것과 같지요" 국내 외화번역의 1인자로 꼽히는 외화번역가 이미도(40)씨. 영화팬들은 배우들의 이름 만큼이나 '번역 이미도'라는 자막이 낯익다.

지금까지 9년 동안 약 350편의 외화를 우리말로 맛깔스럽게 바꿔온 그의 작품목록에는〈글래디에이터〉〈캐스트어웨이〉〈와호장룡〉같은 웬만한 흥행 영화들은다 포함돼 있기 때문. 따라서 매월 3-4편씩, 연간 국내 극장 개봉 영화의 10%를 번역하지만 약 1천 800만명이 그의 이름을 확인하고 극장문을 나서는 셈이다.

올 여름 화제작인〈진주만〉〈툼레이더〉〈드리븐〉〈슈렉〉〈아틀란티스〉〈혹성탈출〉등도 그의 몫이다.

"좋은 영화의 기본은 대본이에요. 될성부른 영화는 대본만 보면 알 수 있지요" 그러나 영어 대본을 의미와 감정, 언어의 문화적 특성까지 살려 우리말 16자로담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주인공의 대사를 그대로 직역했다간 관객들의 눈이 따라잡지 못하는데다 영화의 재미도 반감되기 십상이기때문. 따라서 풍부한 우리말 감각이 외화번역가들에겐 필수 요건이라고 그는 말한다.

애니메이션〈뮬란〉에서 악당들이 나타나 "나는 너의 최악몽이야(I'm your worst nightmare)"라고 한 표현은 다른 영화 속 주인공인 '배트맨'이 곧잘 사용했던 표현. 우리말로는 "용가리 사촌이다"로 바꿔 관객들의 폭소를 자아냈다.

〈벅스라이프〉에서 "93년 나뭇가지 추락사건에 비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니야(It's nonsense compaired to the Twig 1993)"라는 말은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쉽게 떠올릴 수 있는 '삼풍참사'를 빗대 "93년 단풍참사도 잘 이겨냈잖아"로 옮겼다.

또 극 중 곤충서커스 단장인 벼룩이 부르는 "나는 떼부자가 될 거야. 세상에 돈많다는 곤충들은 기다려라. 내가 나간다"는 노래는 "벼락부자 웬 말이냐. 벼룩 부자나가신다"로 깔끔하게 번역했다.

이씨는 가끔 '오버'하기도 하지만 전체 맥락을 해치지 않으면서 재치있는 대사로 웃음을 끌어내는 것으로 이 분야에서 정평이 나 있다.

그래도 '그들만의 조크'가 나오는 코미디를 번역할 때는 지금도 고생해야 한다.

마치 '허무개그'나 '최불암시리즈' 같은 우리만의 유머를 외국인이 웃게 만들어야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방송이나 세간의 유행어는 절대 쓰지 않는다는 게 그의 철칙. '당근이지(당연하지)'같은 표현이 자막으로 들어가면 관객들이 거부감을 느낀다고. 또 스포츠나 과학분야 등 전문 용어는 반드시 전문가의 자문을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릴 적부터 미군 통역 장교였던 아버지 밑에서 혹독하게 영어를 배웠던 그가외화번역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지난 93년. 참고로 종종 여자로 오해받는 그의 이름 '미도(美道)'는 풍요로운 미국을 동경했던 그의 아버지가 '미국으로 건너가 살라'고 지은 이름이다.

대학(외국어대 스웨덴어과)졸업 후 미국에서 2년 정도 광고학을 공부했으며, 귀국해 영화 수입ㆍ배급일에 잠시 참여했다. 그러다 우연히 크리스토프 키예슬로브스키 감독의〈블루〉〈레드〉〈화이트〉를 번역하면서 이름이 알려져 번역을 '업'으로삼게 됐다. 번역자의 이름이 자막에 오른 것도 그가 번역한 〈블루〉부터라고 한다.

그동안 일에만 빠져 살아 그는 아직 혼자다.

"외화번역가에게는 영어는 물론 우리말 구사 능력도 매우 중요합니다. 또 작품속에 들어있는 다양한 문화적 코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백과사전같은 지식과 끊임없는 공부가 필요하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를 좋아해야 하구요" 외화번역가를지망하는 이들에게 그가 주는 조언이다.

(서울=연합뉴스) 조재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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