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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로 상추를 싸 먹는 당신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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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영훈
경제부문 차장

태풍이 지나가자 농산물 물가가 고개를 들었다. 태풍 물가의 정점은 상추가 찍었다. 돼지고기보다 상추가 5배 비싸다는 뉴스가 있었다. ‘금(金)추’라는 딱지도 붙었다. 산술적으로 틀린 얘기는 아니다. 태풍 볼라벤 직후인 지난달 29일 서울 가락시장의 상추 도매가는 돼지고기보다 다섯 배 비쌌다.

 그러나 비교 대상이 잘못됐다. 상추는 도매든 소매든 똑같은 물건이 유통된다. 반면에 돼지고기 도매가는 뼈를 바르지 않은 통돼지(지육·枝肉)가 기준이다. 삼겹살·목살은 일부고, 안 팔리는 부위까지 포함된 가격이다. 지육은 부위별로 해체돼 정육(精肉)이 된다. 이 작업은 기술자만 한다. 인건비가 추가로 든다는 얘기다. 결론적으로 뭉뚱그려진 도매 돼지고기와 생활 속 삼겹살은 완전히 다른 상품이다. 그래서 산술적으로 돼지고기보다 5배 비싼 상추가 있지만, 현실에선 이런 상추는 없다.

 그래도 상추를 삼겹살보다 비싸게 판 곳은 있었으니 상추가 금추가 된 건 맞다. 그러나 10% 비싼 것과 500% 비싼 것은 차원이 다르다. 이게 정부를 닦달하는 수단이 되면 문제는 더 꼬인다. 진단이 조금만 틀려도 해법은 크게 달라진다. 자극적인 숫자를 들이민다고 정부가 가격을 잡을 수도 없다. 시장을 이길 순 없기 때문이다. 기후 등 통제 불가능한 변수가 많고, 재고를 쌓을 수도 없는 농산물은 더 그렇다. 과민반응은 소비자의 물가 불안 심리만 부추긴다. 약삭빠른 장사치가 그 틈을 파고든다. 그러면 물가는 더 오른다. 악순환이다.

 상추 값을 잡는 건 여론의 질책도, 정부도 아니다. 시간이다. 2010년 태풍 곤파스 때 상추 값은 지금보다 더 비쌌다. 그러나 태풍 후 20일쯤 지나면서 가격이 내리기 시작했다. 태풍 여파가 해소되고 생산이 정상화했기 때문이다. 조급증보다 여유를 택하는 편이 낫다는 뜻이다.

 정부 잘못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모두가 정부 탓이냐”고 투덜대지만 자승자박인 면이 크다. ‘배추 국장’ ‘고추 과장’을 지정하며 마치 가격을 관리할 수 있는 것처럼 떠벌린 게 정부다. 해봐야 소용없는 것 말고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 시장 가격은 거스를 수 없으나 시장 환경은 바꿀 수 있다.

 27년간 이어온 낡은 가락시장 시스템이 대표적이다. 가락시장에선 전체 청과물의 약 15%가 거래된다. 대형마트 유통 물량과 직거래 양을 합치면 가락시장의 두 배인 30%다. 그러나 가락시장 경매가는 여전히 농산물 가격의 기준이다. 경매는 속성상 물건이 조금만 줄어도 낙찰가는 확 오른다. 가격 상승기에는 가락시장이 오히려 가격 상승을 부추기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가격이 기준이 되면, 계약재배를 통해 싼값에 안정적으로 농산물을 공급받은 유통업체도 가격을 올릴 여지가 커진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셈이다. 임시변통만 양산해 온 물가 잔소리를 좀 줄이자. 화풀이는 되는데 남는 게 없어서 하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