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자궁" 분만하는 산모 배 만지며…경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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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부들은 출산 때 자신의 몸을 여러 사람에게 보이기를 꺼린다. 여성의 은밀함이 있어서다. 의사들은 “교육을 위해 의대생과 인턴·레지던트들의 참관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산모들은 “실습 대상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비판한다. 산모들의 신체 보호는 어디까지 해야 할까. 전주지방법원이 산모의 손을 들어 줬다. 산모 동의 없이 실습생이 분만 장면을 참관한 데 대해 “환자에게 300만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4일 판결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신세대 산모들의 권리의식을 산부인과 의사들이 쫓아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제동”이라며 “이참에 가이드라인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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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지법 사건 개요는 이렇다. 2010년 4월 초 산모 A씨(29)는 전주의 한 산부인과에서 애를 낳을 때 의학전문대학원 학생들이 분만 과정을 참관한 것 때문에 정신적 손해를 봤다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전주지법 제5민사부는 “여성은 출산 과정에서 신체 중요 부위를 노출하게 될 뿐만 아니라 배변 등 생리적 현상을 조절할 수 없게 돼 보호자나 3자가 입회하면 산모 수치심을 자극해 정신적 침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산모가 분만 과정을 공개할지 선택권이 있는데 의료진이 아닌 3자에게 참관하게 하려면 산모나 가족한테서 사전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못 박았다.

 A씨와 같은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김혜경(32·경기도 부천시)씨는 지난해 9월 친정 근처 경남의 한 병원에서 애를 낳았다. 분만 직후 간호사가 간호대생으로 보이는 여성 둘을 데리고 와 말도 하지 않고 “여기가 자궁이다. 만져지지 않느냐. 느껴지느냐”며 학생들이 배를 만지게 해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조모(27)씨가 2009년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분만할 때 학생인지 인턴인지 분간이 잘 안 되는 사람 대여섯 명이 죽 둘러서서 과정을 지켜봤다. 조씨는 “사람들이 불쑥 들어와 놀랐지만 의사가 그리하니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일부 민감한 산모는 주치의가 아닌 다른 의사들의 내진(內診)에 불쾌감을 표한다. 지난해 10월 서울의 분만 전문병원에서 출산한 서모(31·서울 금호동)씨는 “분만 전 주치의가 오기 전에 전공의로 보이는 젊은 의사들이 몸속으로 손을 넣어 내진을 했는데 항변도 못했다”며 “한마디 설명이라도 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말했다.

 전주지법의 판결에도 논쟁은 여전하다. 대한전공의협의회 경문배(고려대 안암병원) 회장은 “분만이란 게 주치의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옆에서 거들어 줄 사람이 필요하고, 교육도 당연히 필요하다” 고 주장했다. 대한산부인과학회 신정호(고려대 구로병원 교수) 사무총장은 “환자 동의 절차가 생기면 응하는 환자가 적어 분만 과정을 보고 졸업하는 의대생이 희귀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연세대 의료법윤리협동과정 이일학 교수는 “이번 전주지법 판결은 산모의 프라이버시(사생활)를 절대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흐름을 반영한 것”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개인병원은 최소한 승낙을 받아야 하고 대학병원도 그쪽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의료윤리학회 최보문(가톨릭대 의대 인문사회의학과 교수) 회장은 “대학병원 외 일반 산부인과는 사전동의를 받되 대학병원은 교육 기능이 있기 때문에 환자도 일부분 양보해야 한다. 어디까지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보호할지 논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양승조 의원(민주통합당)이 사전 동의 의무화 법안을 만들려다 의사들 반발로 무산됐다. 하지만 선진국에선 환자의 사전 동의가 일반적이다. 국회 입법조사처 김주경 조사관은 “미국에서는 1970년대부터 환자에게 충분히 설명한 뒤 (참관을) 동의 받도록 하는 문화가 정착됐다”고 말했다. 일본도 비슷하다. 2010년 일본 도쿄 시내 종합병원에서 딸을 낳은 호조 야스오(30)는 “동의서를 미리 서면으로 작성했기 때문에 학생들이 참관해도 괜찮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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