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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김 할머니·안 신부에게서 희망을 느낀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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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6·25 때 이불 한 채만 챙겨 들고 월남했던 김순전(89) 할머니가 100억원대 재산을 연세대에 선뜻 기증했다. 굶기를 밥 먹듯 하고 속옷까지 기워 입을 정도로 절약해 모은 돈을 “학비 없어 공부 못 하는 아이들을 위해 써달라”며 내놓았다. 역시 사회 곳곳에 선의(善意)는 살아 있다. 자고 일어나면 터지는 끔찍한 뉴스 때문에 차라리 눈과 귀라도 막고 싶은 요즘이다. 김 할머니의 숭고한 마음에서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하다는 희망을 느낀다. 대한민국 공동체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는 안도감이다.

 어제 서울시 복지상 대상을 수상한 뉴질랜드 출신 안광훈(71·천주교 삼양동 선교본당) 신부의 삶에서도 똑같은 희망을 확인한다. 김 할머니가 버스비를 아끼려 다섯 정거장을 매일 걸어다니며 고생할 때 안 신부는 탄광촌 주민, 철거민, 달동네 세입자를 위해 온몸을 바쳤다. 그 과정에서 자신도 재개발로 세 번이나 살던 집에서 쫓겨났다. 안 신부는 지금도 다세대주택 전셋집에서 승용차·TV·휴대전화조차 없이 지내며 저소득층 소액대출 사업에 헌신하고 있다.

 세상이 각박하고 흉흉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나주 고종석 사건의 여파로 온 국민이 불안에 떠는 와중에 인터넷 포털사이트 등에서는 이미 피해 어린이 A양을 위한 모금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신체·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은 A양이 가정형편마저 어렵다는 소식에 자발적인 돕기 운동이 벌어졌다. “왜 우리는 또 아이를 지키지 못했습니까?”라는 모금 호소에 뜨거운 반응이 몰려들고 있다. 비록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범행이 사회 전체에 충격을 주었어도 시민들은 불안과 분노에만 갇혀 있지 않았다. 조두순·고종석이 남긴 트라우마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자각이요, 아이들을 안심하고 키울 만한 나라를 한시바삐 만들자는 결의다.

 사회 분위기가 어수선하다지만 선의와 감동도 실핏줄처럼 소리 없이 구석구석을 돌고 있다. 아직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사회에는 김 할머니·안 신부 같은 이들이 더 많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덕분에 공동체가 이만큼이나마 유지되며, 가끔 험악한 일이 벌어져도 금세 치유력을 발휘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