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근영의 그림 속 얼굴

바닷가의 수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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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권근영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신문 지면에 우표보다 조금 큰 사이즈로 실린 그림을 두고 그 먹먹한 느낌을 공유하자는 건 무리가 아닐까 걱정이다. 베를린 국립미술관에 가야 볼 수 있는 이 그림의 실제 크기는 가로 1m71.5㎝, 세로 1m10㎝. 아쉬운 대로 상상력을 발휘할 수밖에.

 광대한 바다를 홀로 대면하고 선 수도사는 먼지처럼 작아 보인다. 검은 바다와 그 앞의 어두운 하늘은 이 풍경화의 우울감을 가중시킨다. 다만 저 멀리 한 조각 밝은 하늘이, 그래도 희망은 계속될 것임을 암시한다. 등을 보이고 있어 표정을 알 수 없는 그는, 내가 아닌가 싶은 착각을 준다. 자연 앞에서, 죽음 앞에서, 신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그림이 주는 먹먹함의 실체는 그것이다.

 “세상에서 이 사람보다 불쌍한 사람이 있을까? 거대한 죽음의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한 생명의 불꽃이며, 고립된 세계의 고립된 중심이다. 화가는 회화에서 완전히 다른 지평을 열었다.” ‘풍경화의 비극을 발견한 화가’라고도 불리는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1774~1840)가 이 작품을 발표했을 당시 베를린의 신문에 실린 평론이다. 무한공간 속 고립된 존재, 어디 이 수도자만이 처한 상황일까. 인간의 조건에 대한 공감일 터다.

 실제 바다에서 이런 느낌을 갖긴 쉽지 않다. 갈 수 있는 바다는 대체로 해수욕장이고, 피서철이 아니더라도 일출이나 일몰을 보겠다는 인파로 늘 흥청거린다. 그 틈에 끼어 있다 보면 ‘해는 매일 뜨고 지는데, 여기서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걸까’ 싶어진다.

 대자연 앞의 한없이 나약한 인간, 그 먹먹한 느낌은 오히려 재난 중계방송에서 배가된다. 재난의 스펙터클이라니, 지독한 역설이다. 지난해 동일본 대지진 때 TV에서 가장 많이 반복된 장면을 아직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듯하다. 시커멓게 밀려드는 쓰나미를 피해 절박하게 질주하던 승용차가 결국 파도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던 장면 말이다. 5년 전 겨울 태안반도를 뒤덮었던 기름 파도는 또 어떤가. 자연의 거대함, 재앙의 참혹함, 그리고 그걸 대면한 인간의 왜소함. 신두리 해안사구에서 새까맣게 기름을 뒤집어 쓴 채 앉아 있던 겨울 철새의 사진은 그 망연자실함을 말없이 증언한다.

 태풍 볼라벤이 지나갔다. 그러나 다가올 재난을 기다리며 잠 못 이루던 밤은 한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전기와 가스가 끊길 경우를 대비한 생필품 사재기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문명의 기반이란 얼마나 취약한가. 대체로 잊고 사는 이 인간의 숙명, 200여 년 전 그림이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