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섭의 영화질주] '한니발'

중앙일보

입력

현재 상영중인 '한니발' 은 줄리안 무어(클라리스 스털링) 와 앤서니 홉킨스(렉터 박사) 의 팽팽한 심리전이 빠진 자리를 인간의 뇌를 꺼내먹는 고단위 엽기 처방으로 떼우며 관객을 끌어 모으려 한다.

흥행에서 단타를 치는 효과를 내려는 '한니발' 의 식인 장면. 그러나 영화속에서 식인이나 내장을 꺼내는 잔혹한 취향이 적나라해진 것은 1963년 허셀 고든 루이스가 만든 '피의 향연' 이라는 영화에서부터였다.

이 영화는 살아있는 사람의 심장을 꺼내고 사지를 절단하는 장면등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일명 선지피 영화(고어 무비) 의 시초가 되었다.

그렇다면 고어 무비는 흥행을 노린 저급한 싸구려 공포 영화에 지나지 않을까? 공포 영화 속의 사지절단은 신체라는 경계가 허물어지고 그 내부가 외부로 적나라하게 드러남으로써 우리가 갖고 있는 인간의 육체에 대한 경외감과 금기를 한 순간에 허물어 뜨린다.

그것은 르네상스 이래로 우리가 도그마처럼 떠 받들었던 인본주의 혹은 기독교적인 금기에 대한 냉소적인 위반이기도 하다.

우리의 육체가 영혼을 덮는 신성한 뚜껑 대신 혐오스런 안의 것들을 토내해는 유사 배설구가 되는 자리, 우리의 마음 깊숙이 살아 숨쉬는 존재론적인 불안이 그대로 노출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영화사적으로 볼 때 '한니발' 의 식인은 이렇게 비주류 영화 혹은 B급 영화속에 숨겨져 있던 고어 영화가 이제는 주류 영화에 본격적으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니발' 의 식인은 이전의 B급 공포 영화들이 주던 무제한의 엽기가 주는 흥겨움이랄까, 어떤 아우라가 빠져 있는 것 같다.

마치 길거리에서 어깨 춤 들썩이며 봐야 제격인 난타나 스텀프 같은 공연물을 고상한 예술의 전당에서 보는 격이라고나 할까.

결국 '한니발' 은 지난해부터 국내에도 광풍처럼 몰아 닥친 엽기현상에 대한 일반인의 면역력이 얼마나 높았졌는지를 확인하는 정도에서 허전하게 끝을 맺는다.

그러나 전작 '양들의 침묵' 이 91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타고 그토록 오랫동안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될 수 있었던 것은, 엽기 보다는 한니발과 클라리스 스털링이라는 매혹적인 캐릭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켄슈타인이나 늑대인간처럼 인간의 숨겨진 야수성을 강조하는 영화들과 달리, 한니발 박사는 인간의 악마성이야말로 얼음같은 차거운 이성 그 자체에서 배태될 수 있다는 매혹적인 전례를 남긴 셈이다.

반면 줄리안 무어가 분하는 클라리스 스털링은 겉으로는 강인하지만 왠지 내면의 상처가 있는 듯한 취약한 구석을 보인다.

한니발과 스털링의 묘한 대조와 역전된 살인범-수사관의 관계가 '양들의 침묵' 에 팽팽한 긴장감을 안겨 준 것이다.

형만한 아우 없다고 역시 전편을 능가하는 속편은 없는가. 게다가 에로나 식인같은 맹목적인 자극은 살짝 보여주거나 금기를 앞세우는 발칙함에서 쾌감이 배가 된다. 엽기토끼 마시마로처럼 '한니발' 도 엽기를 다루되 슬쩍 에두르고 감추는 맛이 있었다면 좀 더 낫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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