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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서 찾는 희망의 별빛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285호 30면

은하수를 건너 견우·직녀가 오작교에서 만난다는 칠석(七夕)이 그저께였다. 하지만 계속되는 장마로 별을 볼 수 없었다. 나에겐 한여름 밤 마당에 멍석을 깔고 할머니 무릎에 누워 별을 헤아리던 시절이 있었다.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수를 바라볼 때 긴 꼬리를 그리며 떨어지는 별똥별들이 왜 그리 많았던지…. 별똥별이 사라지기 전에 ‘새 공부’를 세 번 외치면 천재가 된다고 해서 무던히도 애썼다. 하지만 허사였다. 그래도 낯선 도회지에서 여태껏 무탈하게 살아온 건 그 시절에 별을 바라보며 품은 꿈과 소망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로부터 긴 세월이 흘렀다.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오랫동안 별을 잊고 살았다. 별이 있는지, 달이 떴는지, 하늘을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빌딩과 아파트의 위용에 가려진 하늘이 온갖 불빛으로 가득 차니 말이다.

조용철 칼럼

오래도록 잊고 살았던 은하수와 별자리, 견우·직녀를 올 여름 휴가 때도 몽골의 밤하늘에서 보았다. 은하수 서쪽의 가장 밝은 별 직녀성, 그 건너 동쪽 둑에 자리 잡은 견우성을 발견한 기쁨과 신비로움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초원의 밤하늘은 온통 별들로 가득했다. 누우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할머니 무릎에 누워서 보았던 그 별들이 초롱초롱 빛났다.
2004년 여름, 북한의 고구려 고분을 취재할 기회가 있었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란 역사 왜곡에 맞서 고구려 역사에 대한 관심이 커질 때였다. 남북 교류가 활발하던 때인지라 민화협의 협조로 방북 취재가 이뤄졌다. 그때 고구려 고분에서 견우·직녀를 직접 보았다.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의 덕흥리 고분에서다. 벽화 한쪽에 견우와 직녀가 헤어지는 장면인 듯, 소를 몰고 가는 견우의 뒷모습을 직녀가 바라보고 있다. 눈물을 머금은 듯한 직녀의 모습에 가슴이 아렸다.

이듬해 몽골 초원으로 휴가를 떠났다. 밤하늘의 별도 보고, 드넓은 초원에서 말 달리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가슴속에 눌러온 슬픔과 고통을 떨치고 싶어서였다. 손에 잡힐 듯 펼쳐진 별나라의 한가운데 홀로 앉았다. 저절로 자연의 한 조각이 되었다. 눈물이 흘렀다. 평안이 밀려 왔다. 별들이 속삭였다. 고난이 곧 유익이다. 슬픔도 곧 지나간다. 고통도 기쁨이 된다···. 잃었던 꿈과 희망이 솟았다.

그렇듯 대자연은 생명을 품고 위로하고 사랑을 나눠 준다. 그 생명이 귀한 것이든 하찮은 것이든, 크든 작든 차별하지 않는다. 경이롭고 신비로움 자체다. 그 감동을 간직하기 위해 나는 사진을 찍는다. 긴 노출로 촬영한 별 사진을 포토샵으로 밝게 하면 보이지 않던 수많은 별이 나타난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더 많은 별이 있다. 그 별 속에 사람이 산다. 사막의 모래 한 톨 같은 내게 우주의 영혼이 깃든다. 우주와 하나가 된다. 내가 해마다 초원으로 떠나는 이유다.

도시에 사는 현대인들은 별 볼 일 없이 산다. 은하수를 보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자연과 격리되어 산다. 사회와 하나 되기보다 소외되어 산다. 심지어는 스스로 낙오자로 산다. 최근 묻지마 폭력, 묻지마 살인이 연이어 발생했다. 낙오자들의 좌절과 분노의 폭발이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소외되고 낙오된 것에 대한 비틀어진 보복심리다.
더 늦지 않게 묻지마 범죄에 대비해야 한다. 위로의 기술을 발휘해야 한다. 소외와 좌절의 늪에 빠진 이들과 재기의 통로를 만들어야 한다. 일자리와 복지 혜택을 나눠야 한다. 스스로 위로하고 치유할 수 있도록 이웃과 사회가 다가가야 한다. 밤하늘의 별처럼 소중한 생명 아닌가.

아파트 숲에 살더라도 가끔은 하늘을 보며 살자. 먹구름 뒤에 빛나는 별들이 있음을 기억하자. 슬픔과 고통, 분노와 증오의 시간도 한순간이다. 현실이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자. 꿈과 소망을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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