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잃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더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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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청장 앞에서 ‘여의도 칼부림’ 재연 23일 서울 여의도 ‘칼부림 사건’ 현장에서 경찰관들이 김기용 경찰청장(오른쪽)이 지켜보는 가운데 전날(22일) 발생한 사건 상황을 재연하고 있다. 상황 재연 경찰관이 든 칼은 종이로 만든 모형이다. [김도훈 기자]

‘묻지마 범죄’가 잇따르면서 시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8월 들어 불특정인을 대상으로 한 우발적인 범행이 잇따라 발생하면서다.

 22일 서울 여의도에서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퇴근 시간대에 칼부림 난동이 일어났다. 김모(30)씨가 직장 동료 2명을 칼로 찌르고, 자신과는 상관없는 행인 2명에게도 칼을 휘둘렀다. 전날인 21일 울산에서도 이모(27)씨가 수퍼마켓 여주인 김모(53)씨의 배를 칼로 찌른 사건이 벌어졌다. 명확한 범행동기는 없었다.

 18일 경기도 의정부시 지하철 1호선 의정부역에선 유모(39)씨가 무차별적으로 휘두른 커터칼에 시민 8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들 사건의 공통점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실직자가 벌였고 ▶아무 이유 없는 불특정인을 대상으로 했으며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시간대와 장소에서 범행을 했다는 점이다.

 장기적인 경기침체로 인한 고용 불안과 경제 양극화는 묻지마 범죄를 부추기는 한 요인이다. 경찰청에 따르면 우발적 범행은 1994년 23만8646건에서 2010년 35만 6152건으로 증가했다. 이 가운데 2009년(44만 8420건)이 가장 많았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우리 사회가 경기침체에 시달리던 때다. 또 1997년 외환 위기 직후인 98년(29만 9543건)부터 2001년(38만9195건) 사이에도 우발적 범행이 가파르게 늘었다.

 일본도 90년대 이후 장기 불황을 겪으면서 ‘도리마(通り魔·거리의 악마)’로 불리는 묻지마 범죄가 기승을 부렸다. 2008년 6월 ‘아키하바라 칼부림 사건’이 대표적이다. 당시 25세였던 가토 도모히로가 도쿄 아키하바라역 인근에서 행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칼을 휘둘러 7명이 숨지고 10명이 부상을 입었다.

  김일수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은 “경기 불황 등으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현대인은 언제든지 흉기로 변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사회 불만자에 대한 상담·치료 시스템을 구축하고 묻지마 범죄가 큰 대가를 치를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묻지마 범죄자는 대체로 소외 계층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사회의 경쟁 구도에서 탈락한 이른바 ‘루저’들이다.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곽대경 교수는 “묻지마 범죄는 경제적·사회적 약자가 사회를 향해 한꺼번에 불만을 터뜨리면서 발생한다”고 분석했다. 실제 의정부역에서 흉기 난동을 부린 유씨는 중학교를 중퇴하고 최근 10여 년 동안 일정한 직업이 없었다. 여의도에서 칼을 마구잡이로 휘두른 김씨도 최근 직장을 잃고 신용불량자로 추락했다. 수퍼마켓 여주인에게 흉기를 휘두른 김씨 역시 중학교를 졸업하고 3년 전부터 일정한 직업 없이 방에만 틀어박혀 지냈다.

 경찰청 과학수사센터 권일용 경감은 “묻지마 범죄자들은 자신의 상대적 박탈감을 사회 이슈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말했다. 사회적 루저들이 우리 사회를 향해 벌이는 일종의 공개적 불만 표출이라는 얘기다.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이윤호 교수는 “묻지마 범죄는 장소와 대상을 가리지 않아 사실 뾰족한 치안 대책도 없다”며 “안전한 대한민국이라는 신화가 흔들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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