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로 나온 로맨틱 포르노 엄마용 ‘야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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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를 강타한 ‘그레이’ 열풍이 국내에도 상륙했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출간 3개월 만에 미국·영국·이탈리아·독일 등에서 3000만 부(1000만 부는 전자책)가 넘게 팔린 책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를 꺾고 최단기간 최다 판매 기록을 세웠다. 아마존에서 전자책 사상 최초로 100만 부도 돌파했다. “로맨스 소설 시장은 물론 출판의 근본을 뒤흔들었다”(데일리 메일)는 평도 나왔다.

국내에서도 출간 즉시 전자책 판매 1~3위를 휩쓸었다(인터파크). 국내에는 총 6권 중 1부에 해당하는 1, 2권이 나왔다. 입소문·호기심 효과가 일단 먹힌 셈이다. 인터파크에 따르면 “구매자의 82%가 여성으로 중·장년 독자가 많은 서구와 달리 20, 30대 반응도 뜨겁다”고 한다.

이 책은 하이틴 로맨스의 성인·에로 버전인 할리퀸 로맨스에서도 한참을 더 나아가, 섹스 백과사전쯤 되는 로맨틱 포르노다. 섹스는 물론 변변한 연애 경험도 없는 평범한 21세 여대생이 27세 초절정 꽃미남 억만장자의 ‘간택’을 받아 각종 기구가 범람하는 SM(사도마조히즘) 등 수위 높은 변태적 성애를 체험한다는 내용이다. 비현실적 로맨틱·섹스 판타지를 극한으로 밀어붙였다. ‘엄마들의 포르노’라는 수식어 그대로 여성을 주 대상으로 하는 여성용 성애물이다. “출판을 넘어 문화·사회 전반에 붐을 일으킨 포스트 페미니즘 시대의 바이블”(워싱턴포스트)이라는 평이 나온 배경이다. ‘바이블’이란 표현은 과하지만, 시대적 징후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말하자면 이 현상은 성적 욕망의 주체라기보다는 소비 대상이 돼 왔던 여성들이 남성들이 ‘야동’을 보는 것처럼 포르노그래피를 적극적으로 소비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일종의 ‘사건’이다. 여성 그것도 엄마들이, 음지 아닌 양지에서 노골적 성애물을 읽고 그것을 수퍼 베스트셀러 위치에 앉혔으니 말이다.

사실 그간 여성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여성용 성애물은 인터넷 등 달라진 매체환경을 기반으로 은밀하게 성장해 왔다. 미소년을 성적 대상화하는 꽃미남 판타지, 팬들이 아이돌들을 주인공으로 쓰는 각종 ‘팬픽’ ‘야설(야한소설)’이라고 불리는 인터넷 소설 등이 강한 수위와 함께 일종의 하위문화로 존재해 왔다.

‘그레이’의 작가 E. L. 제임스(사진) 역시 올해 나이 49세의 중년 여성으로, 성적 코드가 강한 ‘꽃미남 뱀파이어물’인 『트와일라잇』의 인터넷판(팬픽) 작가 출신이고, 이번 소설도 인터넷에서 쓰기 시작했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레이’가 전자책부터 출간돼 전자책 판매 최고 기록을 세운 것처럼, 여성들이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성애물을 구입할 수 있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도 주효했다.

성적 순진녀와 섹스 머신의 결합이지만, 여러 여성을 잇따라 ‘정복’함으로서 성적 능력을 과시하는 ‘성적 정복담’보다는 성적 결합을 통한 교감에 방점을 찍었다. 남성의 쾌락 못지않게 여성이 리드하는 성적 쾌감도 강조한다. 포르노물의 오랜 공식인 지배와 굴종, 가학과 피학 구도에도 ‘사전계약서’를 통해 쌍방이 ‘합의’하는 과정을 집어넣었다.

사실 이 소설의 치명적 문제는 “그래서 과연 3000만 부가 팔려나갈 만큼 재미있고 수준 있는 에로티즘을 담고 있는가”다. 성적 묘사의 수위는 꽤나 높지만 그를 공감하게 만드는 인물의 입체적 구축이나 극적 전개의 긴장감이 떨어져 솔직히 1권을 끝까지 읽어내기가 힘들 정도였다. 단순하고 유치한 인물과 사건 전개 때문에 헛웃음이 터질 때도 많았다. 섹스를 통해 인간 본성을 통찰하는 문학적 깊이를 찾기 힘든 것은 물론이고, 인물과 극적 구성 면에서도 함량 미달이니, 여성 성애물의 ‘커밍아웃’ 이상의 의미는 찾기 힘들다고나 할까?

어쨌든 ‘그레이’의 인기 돌풍은 남성 중심 성문화의 오랜 전통 속에서 달라진 성 권력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야동’을 보는 남편들이야 쉽게 상상이 가지만, ‘야설’을 읽는 아내란 쉽게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금 말하지만 돈 주고 사서 읽기에는 아깝다. 이런 얄팍한 성애물에 열광하는 유럽 중년 여성들의 내면도 뭔가 공허해 보이고 말이다.

저자: E. L. 제임스
역자: 박은서
출판사: 시공사
가격: 각권 1만2000원

양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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