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간스키가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

중앙일보

입력

러시아 피아니스트 니콜라이 루간스키(Nikolai Lugansky)가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곡집이 에라토(Erato) 레이블에서 새로 나왔다.

1년 전 같은 레이블로 출시돼 2000년 디아파종 기악부문 최고 음반상을 수상했던, 쇼팽의 연습곡을 수록한 그의 데뷔 음반에 이은 것이다.

「전주곡 올림다단조 작품 3의 2」「10개의 전주곡 작품 23」「6개의 악흥의 순간 작품 16」 등 라흐마니노프의 비교적 초기작들이 수록됐다.

1994년 제10회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우승자이기도 한 루간스키는 러시아의전설적인 여류 피아니스트 타티아나 니콜라예바의 유일한 제자로 알려져 있다.

니콜라예바는 타계 직전 한 인터뷰에서 그를 가리켜 "노이하우스, 길렐스, 리흐테르로 이어지는 위대한 러시아 피아노 학파의 정통을 잇는 차세대 연주자"라고 극찬한 바 있다.

그가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 작품집을 들어보면 과연 니콜라예바의 평가가 과장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루간스키의 연주는 뛰어난 기교뿐 아니라 작품 하나하나에 대한 깊이있는 통찰력과 탁월한 분석력, 서정적인 감성으로 충만해 있으며 시베리아 벌판을 닮은 웅장한 스케일과 명징한 피아노 소리는 리흐테르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우울한 러시아적 서정과 멜랑콜릭한 낭만성이 조화된 라흐마니노프의 작품들은특히 그와 잘 어울려 보인다.

라흐마니노프 초기작인 「전주곡 올림다단조 작품 3의 2」에서는 건반 깊은 곳까지 힘껏 눌러치는 듯한 묵직하고 명료한 타건으로 빚어 내는 어둠컴컴한 피아노색이 일품이다.

라흐마니노프적인 멜랑콜리로 가득차 있는 이 곡의 우수어린 색채를 마치 거인의 발걸음같은 묵직한 타건과 베링해의 물결이 달빛에 일렁이는 듯한 차가운 음색의스펙트럼으로 아로새긴 것이 인상적이다.

라흐마니노프가 쇼팽의 「24개의 전주곡 작품 28」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10개의 전주곡 작품 23」은 쇼팽의 것과 마찬가지로 단조와 장조가 번갈아 나타나는 형태를 띠고 있으며 각 곡마다 빠르기 지시말이 하나도 같은 것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가령 첫곡인 올림바단조는 라르고, 둘째곡 내림나장조는 마에스토소, 셋째곡 라단조는 템포 디 미누에토, 넷째곡 라장조는 안단테 칸타빌레 하는 식이다.

각 곡마다 특징도 명확해 어떤 곡은 스타카토가 인상적인 행진곡풍, 어떤 곡은잔잔한 아르페지오가 물결치는 간주곡풍, 어떤 곡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한 광시곡풍 등 다양한 표현기법들이 망라돼 있다.

루간스키는 이처럼 곡들의 특징을 명확히 드러내면서 전체적인 통일성의 조화를잃지 않는 이상적인 연주를 들려 준다.

특히 느린 템포 곡에서의 영혼을 쓰다듬는 듯한 서정적인 루바토와 숨이 멈춰버릴 것만 같은 피아니시모는 일품이다.

슈베르트의 「악흥의 순간 작품 94」에서 영감을 받은 듯한 「6개의 악흥의 순간 작품 16」에서는 곡과 곡 사이에 드러나는 뚜렷한 표정의 대비가 돋보인다.

안단티노에서의 고요한 서정과 알레그레토에서의 신경질적인 음계의 치달음, 안단테 칸타빌레에서의 쓸쓸히 침잠하는 듯한 디미누엔도, 프레스토에서의 격정적인감정 분출 등을 루간스키는 극히 입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탁월한 테크니션이 고도로 정제된 피아니시모의 서정까지 완벽하게 표현해내는 것을 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다.

수록된 곡들이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크게 어필할 수 있는 소문난 명곡들은 아니란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이 음반은 루간스키가 우리 시대의 몇 안되는 젊은 비르투오소임을 여실히 확인시켜 주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정 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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